"새크라멘토는 나의 가나안 땅"
- 작성자 : 전창일
- 조회 : 45,043
- 17-06-30 21:43
"새크라멘토는 나의 가나안 땅"
이영무
이 글의 제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박상근 목사님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의 창작이다 (5월 21일, 2017년 설교 내용 중). 나도 비슷한 생각은 하였으나 그렇게 똑 부러지게 "가나안" 땅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었다. 사실 새크라멘토(새토)는 풍요의 상직적인 땅이다. 다시 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다. 문제는 새토에 사는 많은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점에 대하여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새토를 지나가는 두개의 강물을 보자. 하나는 저 멀리 서쪽 시에라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꽉 찬 America River, 또 하나는 북쪽 Shasta 산에서 흘러오는 Sacramento River 이다. 이 두 강이 흐르면서 만나는 곳이 바로 새토이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사실상 새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상이다. 우선 아메리카강 양쪽으로 펼쳐진 강공원은 자전거 하이킹 등으로 미국 내에서 잘 알려진 곳이며 Delta(the Sacramento-San Joaquin River) 쪽으로 향하면 수많은 과수원이 있고 서남쪽을 쳐다보면 신비스러운 Diablo 산과 운하가 보이며 시내 중심부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정부 청사(the State Capital)와 새로운 명물인 Golden 1 Center가 있고 지척인 Folsom Lake, 조금 멀리 보면 세계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요세미티 공원이 불과 3시간 거리에 있으며 신비로 가득 찬 샤스타 산, Lake Tahoe며 나파의 포도주,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새토는 벼농사를 비롯한 큰 농업의 땅이다. 이 근처에서 나오는 단맛이 도는 과실이 얼마나 많은가? 복숭아, 자두, 앵두, 사과, 포도 등등 수를 샐 수가 없을 정도다. 토마토는 미국 전체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45분 떨어진 곳에는 Apple Hill이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는 농장도 많아 젖(밀크)도 풍부히 나오며 벌들을 유혹하는 나무, 꽃 종류도 많아 근처에서 나오는 꿀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꼭 근처에서 생산되는 젖과 꿀을 마신다. 따라서 새토는 상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내가 새토에 육체적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이지만 미국의 비유적 가나안땅에 안착 할 때까지는 정신적인 시내(Sinai) 광야를 40년 (정확히 37년) 가까이 헤매어야 했다. 이제부터 그 정신적 시내광야에서의 생활과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키며 가나안 땅의 주민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한다. 진정한 주민은 육체적 안주뿐만 아니라 영적인 뒷받침이 꼭 필요함을 터득 하였다. 그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약간의 새토 소개도 아울러 하면서.
내가 처음 새토 근처인 데비스(Davis)로 온 것은1970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UC Berkeley 대학원 학생이었는데 지도교수님(W. Duane Brown)이 UC Davis로 옮기시게 되어 그분을 따라 옮기게 되었다. 한창 진행 중이었던 연구도 마쳐야하고 논문도 써야 되기 때문에 캠퍼스간 교환학생으로(Inter campus exchange student) Berkeley에서 Davis 온 것이다. 그 더운 농촌 캠퍼스로 옮기는 나를 많은 동료학생들은 이해를 못하였다. 완전히 옮기기 6개월 전에 데비스에 와서 하루 종일 캠퍼스를 비롯하여 주위 동네들을 살폈다. 나에게는 딱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전원적이고 사람과 차들이 많지 않고 하여 항상 북적거리는 버클리와는 상반되는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나에게는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구를 하는데 산만하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 좋을 것 같았다. 옮긴 후에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버클리로 내려가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버클리에 소속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버클리로 내려 갈 때는 전쟁터에 나가는 듯 마지못해 갔지만 데비스로 돌아 올 때는 집을 찾아오는 느낌이곤 하였다. 내가 데비스에서 새토로 아파트를 옮긴 것은 1971년 6월이다. 같은 해 3월에 결혼을 하였고 아내의 새로운 직장이 UC Davis Medical Center이었기 때문이다. 바쁘고 자주 밤에도 불려 나가는 아내를 고려하여 병원근처에 신혼의 둥지를 마련 한 것이다. 나는 새벽에 데비스로 등교( 약 35분 거리)하였고 저녁 해가 진 다음에야 집에 들어오곤 하였으며 집사람은 집보다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바쁜 중에도 우리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신혼을 즐겼다. 나는 주로 데비스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새토 지리에는 거의 장님이었다. 예로 집에서 불과 5 마일 떨어진 아메리카강을 발견(?) 하는데 2년이 넘어 걸렸다. 아파트는 새토에 연구실은 데비스에 소속은 버클리 학생으로 그곳에 자주 내려가야 하니 문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렇게 바쁜 생활은 1973년 대학원을 수료 할 때까지 계속되어 사실상 새토에 살면서도 이곳의 지리나 사람, 풍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1973년 여름부터는 전문분야 연구훈련 (Postdoctoral Fellowship Training)을 데비스 의과대학 생화학과에서 시작함에 따라 정신적 여유가 생겨 이곳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가본 곳은 America River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강물이 도시중심을 지나며 흐른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또 이강을 따라가며 이어지는 자전거길이나 하이킹 코스는 일품이었다. 또 이 강변 주위를 따라있는 America River Park은 사실상 자연 그대로 유지되어서 야생동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사슴을 비롯하여 스컹크, 가요디(Coyote), 독사뱀, 토끼, 여우, 칠면조 등등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또 강에는 6월 전후하여 산란을 위한 준치 떼가 올라오며 가을에는 연어가 역류를 타고 전신이 벗겨지면서도 열심이 올라온다. 물론 낚시꾼들의 기쁨은 말 할 것도 없고. 강에서 동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시에라 높은 산 정상에 쌓여있는 눈이 시선을 끈다. 초록색 초원에 푸른 강에서 보는 멀고 높은 산의 눈이 주는 운치는 대단하다. 이곳이 천국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반면 많은 사람들이 새토는 여름에 너무나 덥다고 심한 불평들을 많이 한다. 사실 무지하게 덥다. 때로는 110F 이상으로 올라가며 100F가 넘는 날들이 30일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러나 일단 해가지면 건조한 열(Dry heat)이 일품이다. 나는 이 건조한 열을 몹시 즐긴다. 하이킹, 달리기, 자전거 등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건물 안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지만 저녁식사 이후는 여름저녁 시간을 마음껏 즐긴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무더운 날씨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햇볕을 막으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뿐이었다. 그래서 새토는 녹지대로 나무가 제일 많은 도시 중 하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새토는 나무로 울창한 지역임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서 시 전체를 덮고 있는 나무덮개 (Tree Canopy)가 미국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새토하면 1849년대의 Gold Rush를 빼놓을 수 없다. John Sutter Sr.의 고용인이었던 James Marshall이 1948년 Sutter's Mill에서 금을 처음 발견하면서부터 California Gold Rush는 시작된다. 금발견의 소문은 빨리도 퍼져나가 Sacramento Valley에는 80,000명의 사람들로 홍수를(49ers) 일으켰다. 아이러니는 Marshall이나 Sutter나 혹은 대부분의 49ers 들은 금의 혜택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큰 수혜자들은 그들을 도와주던 장사꾼들(음식과 기타 생활용품을 제공한자들)이었다고 한다. 새토에서 30여 마일 떨어진 Coloma는 당시 골드 붐을 일으킨 동네로 지금은 제임스 마샬 공원으로 바뀌었고 수많은 하이킹 코스가 아메리카 강 상류인 South Fork River를 중심으로 펼쳐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새토는 Sutter family(John Sutter Sr. and Jr.)와 사업가인 Samuel Brannon에 의하여 1848년 아메리카와 새크라멘토 두 강이 만나는 곳(대체로 지금의 Old Sacramento)에서 시작되었다. 1879년 주청사 소재지로 지정되었고 현재의 인구는 약 500,000(주변인구를 합하면 2.5 Million)으로 캘리포니아에서 6번째 큰 도시이며 미국전체에서는 35번째이다. 2002년 하버드대학 Civil Right (Time Magazine의 의뢰로) 연구에 의하면 새토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이 다양한 도사로 지명되었다. 역사적인 Old Sacramento는 가장 앞서 패션 유행을 따라가는 동네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새토에 대한 나의 애착은 1975년 여름 아들 Robert가 태어나면서부터 더욱 커갔다. 나는 집사람과 아들의 장래를 고려하여 가급적 데비스-새토 근처에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하였다. 헌데 1978년 큰 시련이 닥쳐왔다. 나의 건강문제이었다. 나의 왼쪽 팔에 악성종양(Desmoid sarcoma tumor)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악성종양은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하면서 종양을 제거하였다. 그냥 놔두면 팔을 잘라내야 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하여 계속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세 번의 수술이 끝난 이후에도 종양은 계속 자라나는 것이었다. 의사들과 심각한 의논 끝에 방사능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높은 에너지 X-Ray로 종양을 2개월간 쏘였다. 심한 피로감은 치료 중에 또 치료 후에 몇 개월간 지속되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십이지장 궤양이 다시 악화 되어가고 있었다(사실 이 궤양은 나를 은퇴 전까지 계속 괴롭혔다). 총 일 년이 넘는 투병은 내 경력발전 (Career development)에 큰 차질을 가지고 왔다. 우선 일 년여 연구생활에 총력을 기우릴 수 없어 중요한 시점에서 경쟁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특수 분야 연구원 생활(postdoctoral training)을 이미 5년 하였으나 학교로부터 영구적인 position을 확보할 수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초조감이 나를 엄습했고 몹시 괴롭혔으며 끝내는 극도의 좌절감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조그만 일에도 화를 벌컥 내었으며 화목하고 원만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다. 더하여 술을 마시는 빈도가 늘어났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시작하였다. 내 삶은 이제 정지 하였나 싶고 무척 고독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과 연구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최후의 보루인 인내심과 반발력 (resilience)으로 일어나 절실한 삶을 다시 계속 하였다. 모든 자존심을 떨어내고 5년이 넘어서는 훈련 연구원생활을 계속하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급적 피하였다. 나의 직위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참을 수 없게 괴로웠다. 나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연구생활과 무기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데 나의 운명을 걸고 새로운 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우리분야에서 HPLC (High Performance Liquid Chromatography)라는 새로운 개념의 "분리" 기술법 (separation technology)이 등장하여 물질들을 분리하는데 혁명을 가져왔다. 새로운 기술이 다 그러 하였듯이 HPLC의 실제응용이 쉽지 않아 특수훈련과 지속적인 연습이 필수였다. 나의 연구는 항상 초미량의 단백질을 축출하고 분석하는 것이 시작이기 때문에 예민하고 빠른 속도의 새 기술은 내가 꼭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연구에도 진전이 있었고 좋은 내용의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HPLC의 권위자가 되었고 많은 연구원들을 훈련시키곤 하였다. 종양수술 후 3년만의 일이었다. 일련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연구교수로 승진되었다. 8년 동안의 길고 긴 터널이 이제는 끝나는 것인가? 내 연구 분야의 스승(mentor)이던 Jack Preiss 교수께서 미시간주립대학 생화학과 과주임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나도 같이 가자고 초청을 하였다. 미시간대학에 새로운 단백질분석 연구실을 만드는데 나를 그 책임자로 임명하고 이분이 과주임으로 행정적 업무를 하는 동안 내가 그분의 연구실을 사실상 운영하며 점차로 완전히 독립된 교수로 되는 것이 조건이었다. 내 경력의 발전을 위하여는 너무나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내의 안정된 직업을 뿌리 채로 흔들고 어린 아들이 예민한 나이에 낯선 학교로 전학하는 것은 많은 모험이 있기 때문에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특히 아내는 추운 곳을 무척 싫어하는 터라 나의 고민은 더욱 컸다. 3개월간의 집사람과의 의논 끝에 미시간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내 이력을 고려하는 아내의 조언이 결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단 나 혼자서 먼저 가서 그곳의 상황을 살피고 아내와 아들은 일 년 후 쯤 오는 것으로 잠정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985년 5월초 아침에 미시간으로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나를 배웅하며 조용하게 슬퍼하는 아내를 뒤로하며 떠나는 것은 강심장의 사람만 할 수 있는 크나큰 어려움이었다. 이날을 아직 잊지 못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떠난 날부터 아내는 후두염(laryngitis)으로 목의 소리상자 (larynx)가 막혀 일주일 이상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어 10살의 아들을 통하여 안부소식을 전하고 듣고 하였다. 내가 혼자 떠나는 것이 아내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던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었다.
5일후 미시간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과주임과 함께 연구실을 꾸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분자 분석실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력을 다 하는 첫 번째 큰 임무는 두개의 연구실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다행히 처음에는 가르치는(Teaching assignment) 부담은 가벼웠다.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미시간에 온 나로서는 오로지 목적 달성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을 하여 6개월 내에 두개의 연구실을 거의 완전하게 완성시켜 주위에서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이스트 랜싱의 학교 타운에서는 일 하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할 것도 없고 하여 연구만 열심히 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고분자 구조 연구실을 완성시켜 미시간주립대학 캠퍼스의 명물로 군림 하였다. 하지만 연구실 밖에서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바퀴벌레로 오염되었으며 녹물이 나오는 교내의 교수 아파트 생활은 괴로웠다. 또 변변한 식당이라고는 주위에 없어 먹는 것도 시원치 못 하였다. 괜찮은 중국 음식점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몸은 여위어가고 건강은 하향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미국에서 최초의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물론 한인사회에서도 기러기 엄마나 아빠라는 용어는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같은 해 가을 아내와 아들이 미시간을 방문하였다. 아내는 직장 면접을 하기위하여 또 나와 함께 주택을 구입하기 위하여 며칠을 바쁘게 보냈다. 헌데 집사람이 일할 병원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우선 거리가 학교에서 25 마일 멀리 있고 병원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다고 집사람은 하였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의 걱정은 출퇴근이었다. 눈보라에 빙판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의논 끝에 그 병원은 그만두기로 하고 집을 사는 것도 미루었다. 가족들의 미시건 이주가 또 연기된 것이었다. 혼자 좀 더 견디면서 두고 보자. 모든 일을 신중하게 생각 또 생각 하여보자. 나에게는 정말로 좋은 직장이며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무척 좋아했으며 주위의 동료 교수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도 친절하고 사귈 만 하였다. 하지만 집사람도 나 못지않게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직장을 갖기를 나는 무척 원하였다. 그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자.
1986년도는 그 시작부터 무척 바빴다. 연구실의 완성과 함께 대학원 학생들을 유치하여야 하고 새로운 훈련 연구원들도 돌보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컨설팅도 하여야하고 단백질 미량분석 등 보통 연구실에서는 어려운 일 등을 직접해야 했다. 보조하는 조교들을 구했지만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아파트로 밤늦게 돌아오면 가족들 걱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를 이주시킬 것인가 아니면 계속 이대로 살 것인가? 미시건에서의 처음 겨울은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다. 쌓인 눈을 아침마다 쓸어내야 하고 차 유리창의 얼음을 긁어내야하고. 이런 겨울날 운전은 캘리포니아에서의 운전과는 달랐다. 눈도 눈이지만 빙판의 길에서 미끄러지는 차를 운전하려면 고도의 주의가 필요하였다. 나는 추위를 좋아하고 눈 내리는 것을 즐겼지만 아내는 정반대였다. 추위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미시건 겨울을 지날 수 있을까? 또 빙판에서의 운전은 어떻게 하고? 미시건 첫 겨울을 지내고나서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 하였다. 아무래도 춥고 눈 내리는 빙판의 이곳으로 아내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미시간으로 오겠다고 우기는 집사람을 매일 전화로 달래는 것이 나의 저녁시간의 일과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새토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안부가 항상 나를 괴롭혔다. 아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 내가 걱정할까봐 이야기 못하는 것들은 없나? 매일 내일의 안위와 다른 모든 일들이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괴롭히는 주위사람들은 없나? 등등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새토 집으로 4-6 주의 간격을 두고 찾아왔다. 그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토 집을 미시간에서 찾아올 때마다 느꼈던 것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새토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펼쳐진 논밭에 흐르는 강물에 초록색이 도는 정경은 척박한 미시건과는 대조가 되었다. 또 야경은? 시에라 산맥을 넘어 새토 근처로 다가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새토의 불빛은 수없이 많았고 밝았다. 이것 역시 미시건과는 달랐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그곳의 야경은 오직 암흑이었다. 드문 드문 보는 불빛이 전부였고 새토의 아름다운 정경과는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번창 번성하는 새토와 자동차 산업이 서리를 맞은 미시건과는 너무나 극명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또 가까운 사람들도 그립곤 하였다. 미시건에서의 한국인 친구라고는 단 한명. 그것도 90분 떨어진 아나보에 있는 대학동창 뿐이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미시건은 나의 마음속에서 떠나고 있었다. 1986년 여름부터 캘리포니아로 다시 옮길 것을 마음먹고 있었다. 내가 떠나도 미시간주립대학에는 큰 불편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완성된 연구실이니 연구 능력 자격을 갖춘 과학자이면 그 운영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나의 결심을 전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돌아온다는 기쁨 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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