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겨주심의 은혜 (노요한 목사)
- 작성자 : 박창현
- 조회 : 30,068
- 16-03-05 01:04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4:22)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칭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 교리와 전가의 교리를 어렵게 설명할 필요없이 의인으로 칭해 주신다는 것은 아직 실제적 의인이 안 되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겨주심 봐 줘야 한다는 거예요.
법대로하면 누군든 살아남지 못한다는거죠.
국물도 없는데...
뭔가 하나님의 편애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요.
어여삐 여겨주시는 것이 복음이라면,
이에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특수 관계 때문에 정상을 참작해 줘서 겨우
구원받는 형국으로 우리가 살아남는 거예요.
법대로 하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저
사면시켜 주시는 것이 은혜라면...
우리는 감사하는 것 밖에 뭘 더 할것이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현실 세계에서는 뭔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인간의 편에서 거저 받게 되는 구원이라는
것이 시덥지 않아 보이겠죠.
어찌보면 공의롭지 못하게 보이잖아요?
법대로 해야지 공평하게 대해줘야지
왜 어떤 자들은 그런 잣대를 대서 거저
구원시켜 주는거야?
불공평한 하나님 난 공평한 하나님을 믿게다며
그렇게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 있어요.
은혜가 뭔지 알기나하고 말하는건지 당췌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오지말라 한적이 있나요?
영원전 언약 안에 택함 받은자에게 거저
주신다는 그 은혜를 저들이 꿈인들 꾸어
봤을까요?
스스로 뭘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행위주의를
고집한 것은 누구였나요?
물론 저들이 선택 하기 전에 하나님의 작정이
앞서고 있지만, 언제 하나님이 넌 그 언약 안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오지마라 이렇게 말한적 있나요?
자기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겨주셔야 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데 그건
불행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릴 새로운 능력의 몸으로
바꾸어 줘서 전엔 할 수 없는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대단한 사향으로 우리 몸을
업그레이드 시켜 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들이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확인시켜 주시는 거예요.
나의 무력함을 자임하게 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믿게 한다고 했잖아요?
예수 믿음에 전제는 '난 아니다, 입니다.
나를 부인함에 전제가 깔리지 않으면,
예수를 믿게 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성령은 끊임없이
'넌 아니야! 그거 잘 알고 있지~,
이 사실을 잊어버릴때마다 곁에서 가르쳐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할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시퍼렇게 살아서 날뛸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예요.
'너 자신의 한계를 자인하라,
네 분수를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나대는 것이 죄란다.
우린 누구나 그 상황을 극복 할 능력이
없지만, 그것이 죄요 잘못된 것임을 인지할 수는 있잖아요.
내가 그 실존적 죄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된 실존을 실감하게 하시고
나의 할 수 없는 무력을 체휼하게 하셔서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탄식으로 주여 나를 건지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예수가 아님 정말 큰일날뻔 했네요!
이리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성도의 운명적 실존이요.
역사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속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 예수 잘믿게 되었다. 성령을 나의 나됨을 입증하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성령충만을 대망하는자들!
결국 신비주의로 흘러갑니다.
하나님과 기도하여 자유자재로 소통하고
부족함이 없는 관계 안에서 응답받고
필요한 능력과 은사를 체험하여
예언하고 치유하고 하나님 임재를 늘 경험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변화되는 것이 성령받은 성도의
진짜 모습이잖아요?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이런분들 앞에 서면 나의 초라한 모습에서 내가 뭘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깔릴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내 생각이 돌아서곤 하죠.
내가 합당한 자가 되어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어여삐 여겨주심의 은혜 덕분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겨주심의 은혜로 보면 이렇게 잘난 분들은 뭘 여겨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성령이 도와주니 성령을 발판삼아
당당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런 믿음의 차원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확실한 변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믿음 확신에 차고 넘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기도하는 유일한 목적 나의 변화된 그 모습에 자신이 매료되는 겁니다.
나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란 자부심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다는 착각에서 난 이세상에서 구별된 자라는 선민의식이 대단하죠.
저들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어요 기도하면 만사형통입니다.
문제 해결 못한다고 생각될 때 문제 해결사로서의 능력자를 찾게되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이상한 신앙의 양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추구 그집착
대단합니다.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언제 찾게 될까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뭐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기도 못한 나, 전도 못한 나, 교회생활 열심히 못한나, 혈기부린 나, 이 죄를 용서해 주세요.
기복의 도구로 필요할 때만 도움을 구하는
숭배의 신앙의 전형을 보여 주게 되죠.
예수는 필요할 때만 끌어다 쓰는 고마운 분 정도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가능성을 보는자들 그러한 가치관이 뭐가 문제일까요?
인간은 본질절으로 죄인이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성령이 도와 주시면 죄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그럴듯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성령 받기 전이나 후나,
진리가 된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진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몸을 입고 있는 인간의 실존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수련으로 그걸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신비주의요.
성경에 대한 심오한 지식의 힘으로 그걸
바꾸어 현실 세계를 탈피해 보려는 시도가 영지주의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유일하게 바뀌었다면 전에는 할 수 있는자로 오해 했는데 이제는 근본적으로 안 되는 존재 맞네요. 이를 자임하느냐? 않느냐?
그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평생 여겨주심의 은혜로 살게되는 거예요.
아니면 평생을 뭔가 보답할 꺼리를 자꾸 찾게 됩니다.
뭔가 미안하니까? 그걸 만회하려 하려는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거 만회 안 되니까.
계속 면목없이 사는 것이 내 뜻이란다.
끝까지 미안해 하고 황송해 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내 앞에 서야 은혜를 입고 은혜가 왕노릇하게 하며 살 수 있는 거란다.
그리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이렇듯 여겨주심에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생색내는 신앙인이 되면...
우리 모든 신앙생활의 촛점이 내 믿음의
좋고 나쁨, 그리고 나 믿음 있고 없음에 나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게 되어 나 얼마나 잘났는데요?
하나님 나좀 알아 주세요.
이처럼 자기 치장을 위한 회칠한무덤 아니
송장에 분칠하는 꼴이죠.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을 수나 있는 그런
존재가 맞나요?
정말 정신 바짝차리고 말씀 연구하고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충만 받고 기도 응답 받으면 말씀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기나 한 그런
존재가 맞느냐? 이거예요.
여기에 대한 답없이 시작된 신앙생활은
결국은 파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정말~
어여쁘게 여겨 주셔야 한다니까요?
우리가 예수 올바로 믿을 수 있나요?
예수의 믿음을 내 믿음으로 여겨 주시고
"네가 날 믿었네."
그 믿음을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거저
전가시켜 주는 것이 여겨 주심의 은혜예요.
우리 믿음 내가 지금 내 것으로 사유한 믿음이
없다니까요?
'너 믿음 내놔 봐, 하면 내 놓을 것이 없어야 맞아요.
우린 나 믿음 없음을 고백해야지
난 잘 믿고 있죠!
이런 자들은 잘못하면 한대 맞습니다.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수 있어요??
나 믿음없어요.
난 안 되네요.
난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아요.
주여 날 어떻게 해 주세요.
날 빨리 데려가 주세요.
이럴때 주님 말씀 하십니다.
너 믿음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예비했잖아 산제사의 제물되신
예수를,
너네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 심판을 면하게
되는데 말씀대로 지키고 산놈 있음 나와 봐~
그럴때마다
'주여 날 죽여 주세요,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 거예요
그때 어줍잖게~
여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있는데요.라고
내 놓는 자들은 다 염소라는 거예요.
양은 아무것도 내가 한 것이 없었잖아요.
나 어떻게 합니까?
나 한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나 죽어 마땅합니다
나 지옥에 떨어져도 당연한 그런 자 맞아요.
그 때 비로서 여겨주심의 은혜가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 너 땜에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심판을 다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네가 진 십자가란다.
그것이 네가 받은 심판이란다.
"너 그거 하나는 믿어지지
너 그거 하나는 이해되지 하시는 거예요"
~ 그때 아멘 하면 되는거예요.
이런 사실이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날엔 우리가 주를 보듯 밝히 드러나게 되리라.
말씀 하십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될거라
말씀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여겨주심의 은혜 덕분에 살아난 것이요. 그 은혜 덕분에 거저 그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멘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칭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 교리와 전가의 교리를 어렵게 설명할 필요없이 의인으로 칭해 주신다는 것은 아직 실제적 의인이 안 되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겨주심 봐 줘야 한다는 거예요.
법대로하면 누군든 살아남지 못한다는거죠.
국물도 없는데...
뭔가 하나님의 편애 때문에 사랑해 주시는 것이요.
어여삐 여겨주시는 것이 복음이라면,
이에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어요.
특수 관계 때문에 정상을 참작해 줘서 겨우
구원받는 형국으로 우리가 살아남는 거예요.
법대로 하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저
사면시켜 주시는 것이 은혜라면...
우리는 감사하는 것 밖에 뭘 더 할것이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현실 세계에서는 뭔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인간의 편에서 거저 받게 되는 구원이라는
것이 시덥지 않아 보이겠죠.
어찌보면 공의롭지 못하게 보이잖아요?
법대로 해야지 공평하게 대해줘야지
왜 어떤 자들은 그런 잣대를 대서 거저
구원시켜 주는거야?
불공평한 하나님 난 공평한 하나님을 믿게다며
그렇게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 있어요.
은혜가 뭔지 알기나하고 말하는건지 당췌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오지말라 한적이 있나요?
영원전 언약 안에 택함 받은자에게 거저
주신다는 그 은혜를 저들이 꿈인들 꾸어
봤을까요?
스스로 뭘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행위주의를
고집한 것은 누구였나요?
물론 저들이 선택 하기 전에 하나님의 작정이
앞서고 있지만, 언제 하나님이 넌 그 언약 안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오지마라 이렇게 말한적 있나요?
자기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그렇게
믿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겨주셔야 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데 그건
불행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릴 새로운 능력의 몸으로
바꾸어 줘서 전엔 할 수 없는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대단한 사향으로 우리 몸을
업그레이드 시켜 주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었던 것들이 아니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확인시켜 주시는 거예요.
나의 무력함을 자임하게 하는 겁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믿게 한다고 했잖아요?
예수 믿음에 전제는 '난 아니다, 입니다.
나를 부인함에 전제가 깔리지 않으면,
예수를 믿게 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성령은 끊임없이
'넌 아니야! 그거 잘 알고 있지~,
이 사실을 잊어버릴때마다 곁에서 가르쳐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할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시퍼렇게 살아서 날뛸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릴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예요.
'너 자신의 한계를 자인하라,
네 분수를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나대는 것이 죄란다.
우린 누구나 그 상황을 극복 할 능력이
없지만, 그것이 죄요 잘못된 것임을 인지할 수는 있잖아요.
내가 그 실존적 죄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된 실존을 실감하게 하시고
나의 할 수 없는 무력을 체휼하게 하셔서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탄식으로 주여 나를 건지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예수가 아님 정말 큰일날뻔 했네요!
이리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성도의 운명적 실존이요.
역사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속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 예수 잘믿게 되었다. 성령을 나의 나됨을 입증하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성령충만을 대망하는자들!
결국 신비주의로 흘러갑니다.
하나님과 기도하여 자유자재로 소통하고
부족함이 없는 관계 안에서 응답받고
필요한 능력과 은사를 체험하여
예언하고 치유하고 하나님 임재를 늘 경험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변화되는 것이 성령받은 성도의
진짜 모습이잖아요?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이런분들 앞에 서면 나의 초라한 모습에서 내가 뭘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헤깔릴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내 생각이 돌아서곤 하죠.
내가 합당한 자가 되어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어여삐 여겨주심의 은혜 덕분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겨주심의 은혜로 보면 이렇게 잘난 분들은 뭘 여겨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성령이 도와주니 성령을 발판삼아
당당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런 믿음의 차원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확실한 변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 믿음 확신에 차고 넘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기도하는 유일한 목적 나의 변화된 그 모습에 자신이 매료되는 겁니다.
나는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란 자부심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다는 착각에서 난 이세상에서 구별된 자라는 선민의식이 대단하죠.
저들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어요 기도하면 만사형통입니다.
문제 해결 못한다고 생각될 때 문제 해결사로서의 능력자를 찾게되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이상한 신앙의 양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추구 그집착
대단합니다.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언제 찾게 될까요?
일이 잘 안 풀리면..
뭐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
기도 못한 나, 전도 못한 나, 교회생활 열심히 못한나, 혈기부린 나, 이 죄를 용서해 주세요.
기복의 도구로 필요할 때만 도움을 구하는
숭배의 신앙의 전형을 보여 주게 되죠.
예수는 필요할 때만 끌어다 쓰는 고마운 분 정도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가능성을 보는자들 그러한 가치관이 뭐가 문제일까요?
인간은 본질절으로 죄인이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성령이 도와 주시면 죄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그럴듯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받기 전이나 후나,
성령 받기 전이나 후나,
진리가 된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진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몸을 입고 있는 인간의 실존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수련으로 그걸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신비주의요.
성경에 대한 심오한 지식의 힘으로 그걸
바꾸어 현실 세계를 탈피해 보려는 시도가 영지주의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유일하게 바뀌었다면 전에는 할 수 있는자로 오해 했는데 이제는 근본적으로 안 되는 존재 맞네요. 이를 자임하느냐? 않느냐?
그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평생 여겨주심의 은혜로 살게되는 거예요.
아니면 평생을 뭔가 보답할 꺼리를 자꾸 찾게 됩니다.
뭔가 미안하니까? 그걸 만회하려 하려는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거 만회 안 되니까.
계속 면목없이 사는 것이 내 뜻이란다.
끝까지 미안해 하고 황송해 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내 앞에 서야 은혜를 입고 은혜가 왕노릇하게 하며 살 수 있는 거란다.
그리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이렇듯 여겨주심에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생색내는 신앙인이 되면...
우리 모든 신앙생활의 촛점이 내 믿음의
좋고 나쁨, 그리고 나 믿음 있고 없음에 나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게 되어 나 얼마나 잘났는데요?
하나님 나좀 알아 주세요.
이처럼 자기 치장을 위한 회칠한무덤 아니
송장에 분칠하는 꼴이죠.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을 수나 있는 그런
존재가 맞나요?
정말 정신 바짝차리고 말씀 연구하고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충만 받고 기도 응답 받으면 말씀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기나 한 그런
존재가 맞느냐? 이거예요.
여기에 대한 답없이 시작된 신앙생활은
결국은 파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정말~
어여쁘게 여겨 주셔야 한다니까요?
우리가 예수 올바로 믿을 수 있나요?
예수의 믿음을 내 믿음으로 여겨 주시고
"네가 날 믿었네."
그 믿음을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거저
전가시켜 주는 것이 여겨 주심의 은혜예요.
우리 믿음 내가 지금 내 것으로 사유한 믿음이
없다니까요?
'너 믿음 내놔 봐, 하면 내 놓을 것이 없어야 맞아요.
우린 나 믿음 없음을 고백해야지
난 잘 믿고 있죠!
이런 자들은 잘못하면 한대 맞습니다.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수 있어요??
나 믿음없어요.
난 안 되네요.
난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아요.
주여 날 어떻게 해 주세요.
날 빨리 데려가 주세요.
이럴때 주님 말씀 하십니다.
너 믿음 애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예비했잖아 산제사의 제물되신
예수를,
너네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 심판을 면하게
되는데 말씀대로 지키고 산놈 있음 나와 봐~
그럴때마다
'주여 날 죽여 주세요,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와야 정상인 거예요
그때 어줍잖게~
여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있는데요.라고
내 놓는 자들은 다 염소라는 거예요.
양은 아무것도 내가 한 것이 없었잖아요.
나 어떻게 합니까?
나 한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나 죽어 마땅합니다
나 지옥에 떨어져도 당연한 그런 자 맞아요.
그 때 비로서 여겨주심의 은혜가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 너 땜에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심판을 다 받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네가 진 십자가란다.
그것이 네가 받은 심판이란다.
"너 그거 하나는 믿어지지
너 그거 하나는 이해되지 하시는 거예요"
~ 그때 아멘 하면 되는거예요.
이런 사실이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날엔 우리가 주를 보듯 밝히 드러나게 되리라.
말씀 하십니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될거라
말씀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여겨주심의 은혜 덕분에 살아난 것이요. 그 은혜 덕분에 거저 그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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