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목사, 나쁜목사/ 좋은 성도,나쁜 교인/ 좋은 일꾼, 나쁜 일꾼
- 작성자 : 박창현
- 조회 : 37,889
- 16-08-23 09:43
좋은 목사, 나쁜목사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
신자는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좋은 목사를 만나는 것은 정말이지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나쁜 목사를 만나는 일은 지옥같은 일들의 연속이며,
이 경우 신앙의 갈등이 연속된다.
좋은 목사는 항상 바쁜 목사이다.
늘 시간에 쫓기며 산다.
항상 심방을 다니며, 설교를 준비하고,
누구와도 대화하며 자신에 대한 관리를 정말이지 철저히 한다.
여신자와는 단 둘이서 만나지 않는다.
교회헌금에 대하여는 투명하게 집행한다.
혹여 해외여행을 하는 경우라도 성도들이 모아 준
해외선교헌금은 총액규모를 밝히고 다녀온후에는
이를 신자들에게 정확하게 보고한다.
항상 근검절약하며, 청빈한 생활을 몸에 익히고,
교회 관리를 함에 있어 스스로 아낀다.
자신의 전화요금은 자신이 낸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에 철저하게 책임을 지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행동과 언어를 일치시키는 자세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신도 인간임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도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온전히 진다.
늘 기도하면서도 신자들에게 광고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손해가 가는 일이라도
사랑하기 위하여는 이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하고, 빈틈없이 생활한다.
그리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겸손이 몸에 배어 있다.
신도들과 더불어 살려고 애를 쓰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살림살이를 살피고 배려한다.
행여 대외적으로 행사를 나가더라도
그곳에서 받은 사례비는
자신의 수입으로 잡지 않고 교회의 수입으로 잡는다.
그리하여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나쁜 목사는 자신의 이익부터 챙긴다.
아주 계산적이다.
그리고 늘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한다.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자신은 기도를 아주 많이 하는 목사라는 사실을 주보에 광고를 낸다.
다른 사람의 성공담에는 시큰 둥 한다.
다른 사람의 아픈 가슴을 달랠 줄을 모른다.
심방도 필요한 사람만 한다.
그리고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
결국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한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에 도취되어 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순종을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한다.
입만 열면 성도사랑을 외치면서
의로운 신자들에게는 그의 약점을 들추어낸다.
교인들 중에서도 재력이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사례비인상과 관련하여서 이를 삭감하려고 하면
신자들을 일부 동원하여 교회재정장로를 압박하기도 한다.
교회의 분열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겉으로는 화합하는 척하는 외식을 일삼는다.
게다가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집권당의 편을 드는 설교를 하기도 한다.
정치와 종교를 혼동하여, 신자들도 국가의 국민임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신자들에게 이입시키려고 한다.
이 시대에 정말 좋은 목사도 있고, 나쁜 목사도 있다.
어떠한 목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이제는 목회자를 선택해서
교회를 다녀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기문변호사 칼럼)
좋은 목사 나쁜 목사
내 말과 가르침이 역사와 인간 실존
앞에서 얼마나 일치하는지 날마다 성찰해야
예수님도 의사로
자신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처럼 오늘날 목회자도 의사의 역할이 있다. 결국은 좋은 의사나 목사가 될 수도, 나쁜 의사나 목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의사냐 아니냐 하는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좋은 의사는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다. 자기의 의술보다 고통을 당하는 자의 내적 힘을 촉진하면서 약을 투여한다. 약을 남발하거나 도식적 투약을 하지 않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여러 가지 특성을 관찰하여 약을 투여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 할 수 있다. 반면 나쁜 의사란 자기의 기준과 전문성에 의지하여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특성과 환경을 무시한 채 기계적 진단 혹은 도식적 투약을 일삼는 의사를 말한다. 병원 운영에만 관심을 가지고 환자를 봉으로 알고 더
많은 환자, 더 많은 진료라는 의식이 자리 잡은 의사를 나쁜 의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좋은 목사냐 나쁜 목사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비교를 해볼 수 있다. 목사가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학력 등을 과신하기보다 자신이 돌보는 성도의 신앙과 잘됨을 위해 자기가 낮아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좋은 목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삶과 처지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성경 구절을 남발하거나 자존감을 해하는 말을 하는 목사는 좋은 목사라 할 수 없다. 자신의 말과 설교와 가르침이 역사와 인간의 실존 앞에서 얼마나 일치하는지, 한 개인의 삶의 정황 속에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질 수 있는지 고뇌하는 목사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 운영에만 관심을 가지고 성도를 봉으로 알고 더 많은 교인을 끌어 모으는 데 최선의 목표를 삼는 태도는 나쁜 목회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성경 말씀을 외치는 행위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이 목사나 설교자 혹은 여타 기독교인의 입을 통해 전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을 발할 수도 있고 악마의 말로 사용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악랄한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을 오용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해보라.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변명의 수단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오용되는지를 생각해보라.
'약을 남용하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것'이라는
문구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남용함으로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많이 해치고 있는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입을 통해 내뱉기 전에
얼마나 많이 곱씹어야 하는지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두려울 뿐이다.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이 인간의
삶의 실존 앞에서 무력해질까봐 조심스럽다.
좋은 목사,나쁜 목사
요한복음 10:1-15
이홍열 목사
좋은 목사,나쁜 목사
약 3주 전에 ?좋은 교인,나쁜 교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오늘은 그 설교말씀의 후편으로 ?좋은 목사,나쁜 목사?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좋은 목사가 못되면서도 좋은 목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낯뜨거움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약 3년전에 성서연구 클래스에서 이상적인 목사의 모습에 대해서 설문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거기에 보니까 성도들이 바라는 좋은 목사의 모습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1.성도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목사님
2.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에게까지도 친절하신 목사님
3.결코 세속적이지 않으신 목사님
4.가슴이 넓은 목사님
5.친정 아버지 처럼 편안한 목사님
6.당구,볼링,골프,사우나을 즐기지 않는 목사님
7.이왕이면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목사님
8.돈 욕심이 전혀 없으신 목사님
9.너무 거룩한 체 위장하지 않으시는 목사님
10.설교시간이 지루하거나 짜증스럽지 않은 목사님
11.자녀는 하나 정도만 낳으시고 목회에만 전념하시는 목사님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모두 46가지의 조건이 제시되었습니다.이런 조건에 저 저신을 비추어 보면서 완벽한 목사가 되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해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사실 완전한 목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따지고 보면 모두가 삯군 목자입니다.월급 받고 일하니 삯군 목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문제는 삯군이면서 삯군이 아닌척 할 것이 아니라 그 삯군 목자 노릇이라도 바로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이 세상 모든 사람은 그래도 품값받는 만큼 일하지 못하면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집니다.그러나 품삯만큼도 일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양떼들에게 큰 소리만 치는 저 자신이야말로 삯군 중의 삯군이라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송구스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牧師는 사실 牧者입니다.그런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들에게는 ?놈者? 字를 쓰지않고 ?스승師?를 써서 牧師라고 부른 것 뿐이지 양떼를 먹인다는 의미에서는 牧者나 牧師나 다 같습니다.여러분 과연 선한 목자 아니 좋은 목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요한복음 본문의 말씀을 통해 목사인 저 자신과 양떼인 여러분이 모두 피차에 은혜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좋은 목사는 양떼들을 푸른 초장 맑은 시내, 생명의
강가
로 인도하는 목사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 10장 4절을 봅니다.?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온다?고 했습니다.목자의 사명은 양떼를 푸른 초장,맑은 시냇가로 인도하는 일입니다.그러나 목자라고 해서 반드시 양떼를 다 맑은 시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선한 목자만이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선한 목자들은 양들이 잠자는 틈에도 부지런히 초장을 찾아 살핍니다.그래서 언제나 양떼를 인도할 장소를 염두애 두고있습니다.그러나 게으른 목자 삯군 목자들을 그렇게 하지않습니다.그들은 자신의 유익과 이기적 목적만을 추구할 뿐 양떼의 먹이나 양떼의 배고픔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먹여도 양떼의 배부름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때로는 목자가 양떼의 먹이에 무관심한 나머지 양떼들이 먹지 못할 독초를 먹고 절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양떼를 잘못 인도해서 양떼 전부를 영적으로 몰살시키는 목자도 있습니다.
전라남도 모처에 기도원이 하나 있었습니다.기도원의 대표가 자신을 다윗왕이라고
하면서 여신도들을 시녀로 거느렸습니다.그 중 한 여신도가 임신을 하게되었습니다.그러자 그 기도원의 목자는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은총으로 동정녀
임신을 했다고 하면서 그 여인을 마리아라고 부르게 했습니다.그리고 아이의 이름까지 예수라고 지어놓았습니다.그런데 그만 불행하게도 낳고보니
딸이었습니다.그래서 그 아이와 여신도를 산아래로 내쫕아 결국은 파국에 이르게 했습니다.자칭 다윗왕 자칭 목자는 자기 양떼를 푸른 초장이 아니라
죽음의 골짜기로 인도한 것입니다.여기엔 따라간 양떼의 책임이라기보다 잘 못 인도한 목자의 책침이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목자는 언제나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생명의 강가로 인도합니다.그래서 양으로 하여금 영생하는 생명의 꼴을 얻게 합니다.우리 예수님은 참 좋은 목자이십니다.위대한
목사이십니다.그 분을 따라가면 영생하는 양식을 얻습니다.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천국의 평안을 얻습니다.그분을 따라가면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새벽에 이를 수 있습니다.참 좋은 목자,오직 예수님을 따라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로 좋은 목사는 양떼의 젖을 짜기보다 자기의 젖을 짜는
목
사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양떼를 위해 희생하는 목자의 모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오늘 본문 1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좋은 목사는 자기를 위해 양떼를 죽이는 목자가 아니라 양떼를 위해 자기가 죽는 목자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사이에는 두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하나는 어떻게 하면 양의 젖을 많이 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목자입니다.양떼의 아픔에는 관심하지않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유전공학적으로연구해서 젖만 많이 짜려고 합니다.양계장 같은 곳에 가보면 밤에도 전기불을 환하게 켜서 닭이 낮인줄 착각하게해서 알을 더 많이 낳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산 곰의 웅담을 빼내는 일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닭도 밤에는 잠을 자게해야지 전기불을 겨서 낮에도 알을 낳고 밤에도 알을 낳으라고 다그치니 그 닭의 몸이 제대로 견뎌 내겠습니까? 차라 리 달걀을 한 개 덜먹고 말지 강제로 뽑아낸 달걀먹고 얼마나 몸에 좋겠습니까? 양떼의 젖을 많이 짜는 데만 관심을 두는 목자가 있습니다.양떼의 신음소리는 아예 들으려고 하지않습니다.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양떼를 더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목자입니다.참 목자는 어떻게 양떼의 젖을 조금이라도 더 짜낼까를 생각하는 목자가 아니라 어떻게 자기의 젖을 짜서 양떼를 먹일까를 생각하는 목자입니다.
저도 좋은 목사 축에 들지는 못합니다만 항상 그런 마음이 듭니다.어떤 성도가 헌금을 좀 많이합니다.그러면 감사한 마음보다는 깜짝 놀라서 저렇게 헌금 다 드리고나면 무얼먹고 사시나 양식이나 떨어지 않으셨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어떤 분은 헌금 많이하면 축복많이 받는다고 가르칩니다.그래서 교우들이 헌금많이 하면 기분이 좋다고합니다.하지만 저는 솔직히 헌금을 형편보다 많이 하시면 걱정이 앞섭니다.왜냐하면 안스런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양떼의 젖을 잘 짠다면 그는 선한목자이기 어렵습니다.왜냐하면 참으로 선한 목자는 양이 아플까봐 마음놓고 젖을 꽉꽉 쥐어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양떼가 아파할까봐 젖을 잘 짜지 못하는 목자를 만나신 여러분은 행복한 양떼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교우들 웃음) 앞으로 혹시 먼 훗날 여러분들이 새로운 목자를 만나시게 되더라도 양떼의 아픔을 먼저 생각한 나머지 젖을 잘 짜지 못하는 목사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그러면 틀림없습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선배목사님을 찾아갔답니다.찾아가서 하신다는 말씀이 ?목사님 목회 못 해먹겠습니다.? ?아니 왜 또 야단이요.??아 글쎄 목사님 생각해보세요.이런 분통터질 일이 있습니까? 양떼를 키워서 젖좀 짜먹을 만 ~ 하면 글쎄 이 양이 큰 교회로 다 가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작은 교회 목사는 양떼 키우느라 죽어라 고생만 했찌 실속이 없습니다.고생해서 키워 놓으면 젖은 큰 교회 목사님이 다 짜서 잡수시니(교우들 웃음) 이 아니 통분할 일입니까? ?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선배 목사님이 후배목사님에게 한 마디 하십니다.?자네는 젖 짜먹으려고 양떼 키우나? 예수님이 양떼들 젖짜먹으려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지셨나? 목회철학을 바꾸게? 그랬답니다.
그렇습니다.선한목자는 양떼의 젖을 짜기위해 양떼를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털을 얻기위해 꼴을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다만 그 양떼로 하여금 생명을 얻도록 하기위해 키우는 것입니다.양떼가 풍성한 꼴을 얻는 것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오늘 본문 속에서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양떼를 위해 자기 젖을 짜주는 목자,자기가 먹을 양식이 아니라 양떼가 먹을 생명의 양식을 먼저 염려하는 목자, 그래서 양떼를 위해 죽는 목자, 그런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3. 셋째로 좋은 목사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때문에 양을 치는
목사입
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말씀에 보면 선한 목자라는 말씀이 거듭해서 나옵니다.?나는 선한 목자라.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나는 선한 목자라.내가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러분 삯군 목자라고해서 양떼를 고의적으로 낭떠러지나 진흙탕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들도 좋은 초장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삯군 목자라고해서 양떼를 전부 굶겨 놓고 혼자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들도 목자의 역할을 다 감당합니다.그런데 삯군과 선한 목자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그 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삯군은 의무때문에 일하고 선한 목자는 양떼에 대한 사랑때문에 일한다는 차이입니다.여러분 같은 목자이지남 여기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의무때문에 일하는 사람은 의무이상을 감당하지 않습니다.이리가 오면 도망갑니다.우선 자기가 살아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 선한 목자는 주인이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양떼를 위해 이리와 싸우다가 대신 죽습니다.그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 이전에 바로 양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양떼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그래서 좋은 목사는 목사의 직분에 대한 의무때문에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목자의 목회철학은 비단 주의 종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양떼에게도 적용됩니다.의무때문에 일하는 성도라면 그는 100점을 받기 어려운 성도입니다.내가 아무개 교회의 등록교인이기 때문에,내가 장로요 권사이기 때문에,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하고 봉사한다면 그런 분은 의무상 교인입니다.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이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하고 전도하고 섬긴다면 그런 분이 참 일등교인입니다.의무상 교인은 교회가 어렵거나 마음에 들지않으면 언제라도 교회를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다.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성도는 아무리 교회가 어렵고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그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그 교회를 끌어 안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웁니다.
의무감에서 일하는 목사는 자기 양떼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사랑때문에 일하는 목사는 아무리 힘고 어려워도 자기의 양떼를 떠날 수 없습니다.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그분은 여러분을 의무때문에 사랑하시거나 책임감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분은 아닙니다.사랑 그 자체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몸을 산산이 부서지도록 내어주신 목자이십니다.자기를 죽이기까지 양떼를 사랑하신 예수님! 그래서 그분은 누구보다도 선한 목자요 바로 여러분의 좋으신 영원한 담임목사님이십니다.
4. 마지막 넷째로 좋은 목사는 한 없는 용서로 양떼를 기다려주는
목사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양이라고 다 순하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저도 양떼였던 시절이 있습니다만 말아야 바른 말이지만 양떼라고 다 천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개중에는 말썽꾸러기 양도 있습니다.목자를 떠나서 대열에서 이탈하는 양떼도 있습니다.그렇게 그 곳으로 가면 않된다고 타일렀는데도 끝내는 목자의 말을 듣지않고 제길로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수렁에 빠지는 양도 있습니다.그럴 때 삯군 목자는 그렇게 말합니다.?그것참 고소하다. 그것봐라. 내 말 안듣더니 꼴 좋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자기말을 듣지않고 제갈 길로 가다가 흙탕물에 빠진 양이 있을지라도 다시 꺼내서 씻겨주고 아픈 곳을 치료해 줍니다.그래서 좋은 목자는 오래도록 기다립니다.빨리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랍니다..
시편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목자이신 우리 하나님은 잘못한 양떼를 한 없는 용서함으로 기다려주시는 목자이십니다.그런 목자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의 모습이 호세아서에 잘 나타 있습니다.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그런데 이 고멜 이라는 여인은 사실 몸을 파는 부정한 여인입니다.고멜이라는 이름의 뜻도 ?다 된 여자, 갈 데까지 간 여자,볼 장 다 본 여자?라는 뜻입니다.그런 고멜을 데려다가 호세아가 결혼합니다.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둘을 낳고도 제버릇을 못고치고 집을 뛰쳐나가 다른 남자이 품에 안깁니다.그 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돈을 주고 그고멜을 사서 다시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는 것입니다.여러분 여기서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고멜은 죄짓고 우상섬겨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호세아의 고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입니다.집을 뛰쳐 나가 다른 남자와 사는 고멜같이 부정한 이스라엘 백성, 그들을 목자되신 하나님은 인내와 용서로 기다려 주십니다.그리고 그들의 추함과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그 양떼를 사랑하십니다.호세아의 하나님,고멜의 하나님,이스라엘의 하나님,아니 여러분과 저의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영원하고도 참으로 좋은 목자이십니다.
좋은 목사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양떼들에게 있어 커다란 행복입니다.남편을
잘못만나면 까짓거 한 평생 참고 살면 됩니다.그러나 목자를 잘못만나면 상황은 다릅니다.이것은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오래 살고 짥게
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이것은 내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좋은 목사를 만나야합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이 땅위에서 그런 목사님을
찾아나선다면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왜냐하면 이땅에는 참으로 완전하고 좋은 목사는 존재하지않기 때문입니다.아무리 유명하고 아무리 훌륭해도
그들에게도 먼지가 있고 그들에게도 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참 좋은 목사님이 계십니다.그분은 우리가 애 써 찾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목자이십니다.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 오시는 목자이십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분 만은 믿을 수 있습니다.그 분 만은 내 생명과 내 영혼 전체를 맡길 수 있습니다.그 분은 하물많다 죄 많다 실력없다 가난하다며 자기양을 구박하지 않으십니다.다만 자신의 양떼를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양떼에게 무엇을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바칠 대상으로서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 자신의 양떼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참 좋으신 목사!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영원하고도 완전한 참 좋은 목사 그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그 분에게 생명이 있고 그 분안에 영생이 있습니다.바로 그 목자를 만나시기 바랍니다.선한 목자,영원한 목사,참 좋음 목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과 그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좋은 성도,나쁜
교인
디모데 후서
1:13-18
이홍열 목사
좋은 성도, 나쁜 교인
주보를 유심히 살펴보시는 분는 오늘 설교제목을 보시고는 다소 도전을 받으셨을 줄 압니다. ?좋은 성도와 나쁜 교인?이라? 우리 목사님이 오늘 아침엔 흑백논리로 양과 염소를 가르는 작업을 하시려는 것 아닌가 하고 경계하시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이거 잘못해서 나쁜 교인축에 들면 큰 일 인데 오늘 아침 잘 못 왔구나 싶은 분은 계시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여러분을 나쁜 교인으로 매도할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경계하는 마음 갖지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사도바울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복음전도자입니다. 아마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큰 공헌을 한 분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사도바울은 위대한 사도요,뛰어난 설교자요,능력있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그 위대한 일을 다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때로는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도바울 주변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사도바울에게 용기를 주고,위로가 되고,도움이 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러한 바울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참으로 좋은 교인의 모델을 찾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첫째로 ?오네시보로?라는 성도를 기억하십시다.
오늘 디모데 후서본문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오네시보로라는 인물을 언급합니다. 얼마나 오네시보로가 사도바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으면 바울은 ?원컨데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것도 모자라서 ?원컨데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네시보로가 주의 종 바울에게 이토록 깊은 인상,아름다운 이미지를 남겨주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속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 부지런히 나를 찾아 만나주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윤리 도덕적인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의로운 핍박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기회가 왔다 싶어서 온갖 악평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감옥에 갈 수 있느냐 무엇인가 법을 어겼으니 간 것 아니냐 벌을 받을만 하기에 받는 것이다라는 등 험담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직자의 윤리가 어떻고 목회자의 도덕관이 어쩌고하면서 바울을 매도하려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할 때는 그래도 주의 종으로 알고 접대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니 사정이 180도로 바뀐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바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바울을 도운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본문에 나타나는 부겔로와 허모게네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를 보세요. 그는 그렇게 하지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의 진실을 끝까지 믿어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받는 이 고난이 의로운 고난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힌 바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있었지만 오네시보로는 그렇게 하지않았습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옥중으로 부지런히 바울을 면회갔습니다. ?바울 선생님 많이 괴로우시죠? 옥에 갇힌 사실보다 사람들의 몰이해가 더 마음을 아프시게 할줄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바울선생님의 진실과 복음에 대한 열정를 믿습니다. 평소의 바울 선생님을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지금 옥에 갇힌 바울 선생님도 여전히 사랑합니다. 선생님 곧 좋은 소식이 있을거예요. 저희가 기도하고 있으니 너무상심하지 마세요. ? 아마 그런 위로를 바울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위로가 되어주었고 낙심한 바울에게 용기가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진정한 성도입니까? 주의 종이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그 진신을 믿고 끝까지 주의 종을 도와 복음의 사역을 계속하는 성도입니다. 도중에 바울을 버리고 제갈 길로 가버린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평소 아무리 아름다운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선한 성도의 명단에 그 이름을 남기기가 어렵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진정한 충신을 알아보는 법이며 집안이 어려울 때 진정으로 어진 아내를 알아보듯이 주의 종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참으로 좋은 교인 선한 성도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기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은 바울 개인을 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과 함께하는 성령을 끝까지 수행했다는 말이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사역에 끝까지 함께 동행했다는 말입니다. 영광중에 있는 바울이 아니라 옥에갇힌 바울을 찾아갔던 오네시보로! 그는 우리에게 좋은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2. 둘째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기억하십시다.
우리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인격적인 성숙함을 보게 됩니다. 신앙적인 원숙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보세요. ?바울과 테글라 행전?이라는 자료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머리에 안짱다리,자그마한 몸집에 눈썹은 맞붙고 코는 얼굴균형에 비해 약간 컸다고 했습니다. 대머리에 키도 작고 코만 컷으니 결코 미남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외모는 전혀 별 볼 일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사도바울은 간질환자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너희가 이를 업신여기지도 아니 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업신여긴다?는 말의 희랍어 원뜻은 ?침을 뱉는다?는 뜻입니다. 크렌켈이라는 사람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간질로 인한 발작을 대단히 두려워해서 간질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면 침을 뱉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 14절의 말씀을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시험거리가 되는 간질병이 내 육체속에 있음은 여러분도 아시는 바입니다. 마땅히 그런 나에게 침을 뱉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제게 침을 뱉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처럼 맞아주었습니다. ?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외적인 조건에서 바울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대머리에 안짱다리 키는 작고 눈썹은 마주붙어 일자 눈썹에 간질병까지 있어 가끔 발작을 일으킵니다. 정붙을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바울을 놓고 갈라디아교인들은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업신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침뱉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눈이라도 빼줄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좋은 교인의 모델을 발견하게 됩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사랑했기에 그가 전하는 예수를 사랑했기에 바울도 함께 사랑한 것입니다.
지금 제가 바울의 육체적 약점만을 말씀했습니다만 왜 바울이라고 또 다른 허점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성공적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바울의 육체적 인격적 부족함을 덮어주고 메워주고 감추고 감싸며 그를 도왔던 갈라디아교회 교인들같은 좋은 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의 종과 하나님의 교회의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고 감추어주면서 그가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해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교인이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의 교인의식을 비교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언제나 전교인이 다 여당입니다. 다 목사님편이요 장로님편이요 하나님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못한 교회에 가보면 야당이 많습니다. 자기들의 담임목사에 대해서 절대로 좋은 평가나 말을 하지않습니다. 목사님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성도가 인기를 얻습니다. 여려분 정치에는 야당이 필수적인 존재입니다만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사탄이라는 야단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성도 여러분까지 야당에 가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모두 하나님편이요 여당뿐입니다. 어떤 교회 교인은 자기가 그 교회 야당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실수하지않나 그것만 쳐다보고 연구한답니다. 설교시간에도 아주 열심히 듣는답니다. 은혜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실수한 내용을 체크하기위해서 듣는답니다. 그러면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바울을,허물많은 바울을,그것도 육체적인 가시 간질병을 가진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존경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을 기억하십니다. 부족함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바울을 사랑하고 아꼈던 갈라디아 교인들! 우리교회에는 그런 좋은 교인들만 넘쳐나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셋째로 바울의 동역자 누가를 가억하십시다.
우리 다시 성경 말씀 디모데 후서 4:10-11 을 보겠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
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
느니라. ?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떠나지 않은 누가가 있습니다. 여러분 디모데 후서를 쓰는 바울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십시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예수때문이요 복음때문입니다. 4장 6절 말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바울은 지금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데마나 그레스게가 바울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자연인 바울 한 개인을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의 예수님을 떠난 것이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떠난 것이요 바울의 사명인 선교의 사역에서의 떠남을 의미합니다. 아마 데마나 그리스게는 자기딴에는 현명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좋아서 그 선교여행이 멋이 있고 낭만이 있어 보여서 참 귀한 사명인 줄 알아서 열심히 따라다녔는 데 지금와서 내꼴이 이게 뭐람,바울은 옥중에 갇힌 신세가 되었고 복음사역의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한데 젊은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어야 하나. 더 늦기전에 내 살 길을 찾자. 차라리 데살로니가로 가서 조그마한 사업이나 벌려봐야지. 아까운 내 청춘 늦기 전에 살 길 찾자 ? 그런 심정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마를 향해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떠났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어땠습니까?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있었다는 말는 곧 복음과 생명을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함께 했다는 말이요 사명감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여려분 누가 좋은 교인이요 선한 성도입니까? 이해따라 세상적인 욕심따라 주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어주는 누가같은 성도, 그가 참 좋은 교인입니다. 사도바울이 옥에 갇히는 그 어두움의 순간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았던 누가에게서 우리는 좋은 교인의 모습을 봅니다. 교회가 행여 어렵더라도 끝까지 우리 남부교회를 끝까지 붙들고 생사를 같이하리라는 각오를 가진 성도, 그래서 결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떠나지 않는 성도,바로 이 자리의 여러분들이 참으로 좋은 교인입니다. 끝까지 누가로 남아있을 지언정 결코 데마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마지막 넷째로 디모데를 기억하십시다.
디모데 후서 1:3-4절을 다시 봅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게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함이니. . . . . ?
여기서 우리 디모데의 눈물을 살펴보십시다. 디모데가 흔린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기에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바울이 그 눈물을 기억하고 있을 까요? 아무 때나 흔하게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헤어지기 서러워서 소녀처럼 감상에 젖어 흘리는 갑싼 눈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디모데의 눈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는 중에 흘렸던 눈물이거나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바울을 생각하고 흘렸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눈물,바울을 위한 눈물 곧 주의 종을 위한 눈물 그것이 바로 디모데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런 고귀한 눈물이었기에 지금 바울이 그 눈물을 다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여름 건강관계로 2달간 설교를 쉴 때 시골 집으로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가서도 몸이 않좋아서 방에 누어있었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 데 누군가 제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어려서 먹을 것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입을 것 제대로 입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몸이 속빈 강정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다 나의 죄입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셔서 아 아들을 다시 강건케 하시고 끝까지 주의 일 감당하게 하옵소서. ? 그런 기도와 함께 뜨거운 물방울이 제 얼굴에 떨어집니다. 여러분 눈물에도 차별이 있답니다. 똑같은 사람이 눈물을 흘려도 며느리를 위해 울 때는 그 눈물이 차가운데 딸을 위해서 울 때는 뜨겁답니다. 뜨거운 눈물이 진짜지요. 제얼굴에 떨어진 그 물방울이 바로 뜨거운 것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하여 낙향한 아들을 위해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아마 나이들어 어머니의 눈물을 본 것은 작년 그때 외에 다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주의 종을 위해 흘리는 노 권사님의 눈물 그 눈물을 아마 저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눈물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이 아니고는 눈물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우리 교회를 위해 뜨거운 눈물로 기도하시는 좋은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을 비롯하여 이 땅의 주의 종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려 기도해주는 성도,그런 성도가 바로 좋은 교인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얼굴속에서 주를 위해 바울을 위해 눈물을 흘렸던 디모데의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내힘으로 않되지만 좋은 교인은 내 노력으로 될 수있습니다.
옥중의 바울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도왔던 오네시보로,바울의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용납하고 맞아주었던 갈라디아교회의 이름없는
교인들,모두가 바울을 떠났어도 끝까지 바울의 고난의 현장을 지켜주었던 누가,그리고 바울을 위해 주님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려 기도해주었던
디모데,그들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속에서 그런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들이
넘쳐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좋은 일꾼, 나쁜 일꾼
오늘 우리 교회는 20년 역사상 처음으로 장로님 두분을 새로 모시고 권사님 두분을 더 모시는 임직예배를 드리게 됩니다.우리 교회의 큰 축복인 동시에 모든 교우들의 기쁨인줄 압니다.오늘 아침 저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을 세우는 장로 권사 임직예배를 몇시간 앞두고 다시한 번 좋은 일꾼,나쁜 일꾼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오늘 말씀은 ?좋은 교인, 나쁜교인?,? 좋은 목사,나쁜 목사?,?좋은 교회,나쁜 교회?에 이은 씨리즈 마지막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인 요한복은 6장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입니다.본문의 내용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줄 본문을 통해 좋은 일군의 모습을 찾아 보십시다.
1.첫째로 좋은 일꾼은 예수님의 눈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취해 따라온 사람들이 오천명이나 되었습니다.아이들과 여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3배이상으로 늘어납니다.말씀에 취해 있는 순간에는 시간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몰랐습니다.그러나 이제 말씀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까 벌써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합니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점심도 제대로 못먹고 따라온 사람들입니다.지금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집에 도착하면 저녁때가 넘을 것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배가 고픈 저 무리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예수님은 어떻게 하든지 배고픈 저 무리들을 먹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그래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이 다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좀 사올만 한 곳이 없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그런데 제자들의 시각을 보세요.빌립이 대답하는 말입니다.?원 주님도 말씀이라고 다 하시면 저희는 어떻합니까? 이 사람들이 겨우 요기만 한다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가지고도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여러분 보세요.제자들의 눈에는 배고픈 무리들이 귀챦고 성가신 존재로 보였습니다.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 무리들이 불쌍한 존재로 보인 것입니다.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니 굶주린 저 무리들이 안타깝습니다.여기가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입니다.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뿔쌍한 존재입니다.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목자없는 양떼들입니다.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십자가에 몸을 던져 구원해야할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좋은 일꾼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시각을 가진 분들입니다.나의 눈으로 교회를 보지마십시다.나의 눈으로 주의 종을 보지마십시다.안믿는 남편 교회가자고 해도 말않듣는 남편 냬눈으로 바라보고 야속하다고 하지맙시다.예수님의 눈으로 보세요.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세요.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보이지않던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많이 썩이셨답니다.하여튼 아버님이 젊으셨을 때 술, 도박 그외 등등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셨답니다.당신은 좋아서 하신 일 일지라도 어머니에게는 가슴에 못을 밖은 일이었을 것입니다.모두 58년간을 같이 사셨는데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신 것은 58일이 될까 말까 하시답니다.그런 아버지께서 말년에 골수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소대변을 받아 낼 정도가 되었습니다.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괘씸하고 밉기가 짝이 없습니다.소시적에 아내 가슴에 못을 박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자업자득이지 뭐? 하는 생각을 하면 아픈 남편이 고소하다는 생각까지 드신다는 것입니다.그런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죄가 미우냐 사람이 미우냐 하면 죄가 미운 것이지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바로 저 양반에게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위로라는 생각이 드신다는 겁니다.그렇게 생각하면 아내 가슴에 못을 박은 남편이지만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행위야 괘씸하고 밉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니 불쌍하고 측은해서 죽을 끓여드리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 고름 빨래를 다 하시고 소대변을 받아내셨답니다.여러분 예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60년 웬수도 불쌍하게 보이는 법입니다.(교우들 웃음)
여러분 좋은 일꾼은 예수님의 눈으로 교회를 봅니다.세상을 봅니다.목회자를 봅니다.그러면 섭섭하고 속상한 것보다는 안타깝고 사랑스런 마음이 들 것입니다.귀챦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생명바쳐 사랑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원수가 없읍니다.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의 죄와 허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가 보입니다.그래서 닦아주고 씻어주고 싸매주게 됩니다.디베랴 바닷가의 배고파 허기진 무리들을 보시고 먹을 것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시각, 바로 그런 예수님의 눈이 좋은 일군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2. 둘째로 좋은 일꾼은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주님께 맡겨 해답을 찾는
안드레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꾼 뿐 아니라 모든 일꾼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무완수입니다.명령를 받고 일하다가 도중에 힘들다거나 어렵다고 포기해버린다면 그 사람은 좋은 일군으로 대접받을 수 없습니다.내게 주어진임무 내게 주어진 사명은 생명걸고 완수하는 것은 일꾼의 의무요 기본 윤리입니다.하나님의 일꾼에게도 바로 이런 책임감이 요구됩니다.이런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여기 오늘 본문의 안드레를 보세요.지금 예수님께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식사문제를 걱정하고 계십니다.?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을 어디서 좀 구할 수 없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대답은 두가지였습니다.빌립이 재빨리 가로되 수학적으로 아주 논리정연하게 이론적으로 반박합니다.?주님 이 사람들이 다 먹으려면 2백 데나리온의 떢이 있어도 부족합니다.그만한 돈도 없고 또 돈이 있다해도 그 많은 떡을 당장에 구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여러분 예수님께서 돈도 없고 떡도 없는 것을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돈도 없고 떡도 없으니 예수님 못합니다.?아 그런 대답이야 누구인들 못합니까? 좋은 일꾼,좋은 제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안드레를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믿기지 않지만 음식을 찾아 나섰습니다.?누구 먹을 것 가진 사람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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