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의 변질
- 작성자 : 박창현
- 조회 : 29,909
- 17-02-19 00:55
평신도의 변질
사람이 하는 일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는 법이 없다. 돈맛을 알면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가 최곤줄 안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가난할 때는 뭐든지 잘 할 것 같고 돈 생기면 남 도와주고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할 것처럼 흥분하지만 막상 자신이 권력이나 돈맛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남들처럼 살아갈 뿐이다. 모든 것이 식상하다. 솔로몬의 전도서가 다 그런 내용이다. 세상의 맛이란 맛은 다본 솔로몬의 첫마디는 '모든 것은 헛되다'라는 말이다. 지나고 보면 별거 없다는 말같이 들린다. 헛되다는 말은 다시 얘기하면 겨울에 입김을 호하고 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입김과도 같은 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들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별볼일 없이 끝나버리는 것이 많다. 평신도라는 말이 그 중하나다. 평신도 하면 어감이 어떤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 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리의 언어에서 보면 안다. '평신도가 뭘 아나요.' 즉 '평범한 신도'다. 하지만 이건 분명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의 신분을 거룩한 제사장이다, 선택받은 백성이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고 규정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언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셈이다. 무척이나 겸손하다.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만인제사장'을 들고 나왔다. 목사나 성직자가 따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는 성경적인 아이디어를 다시 회복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다시 인간의 손맛을 거쳐가면서 변질되고 있다. 평신도는 마치 교회와서 헌금이나 내주고, 찬송이나 불러주고, 예배나 봐주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병신도'라고까지 부른다. 할 줄 아는게 없다고... 쪼끔만 신앙이 성장하는 것 같아서 간증 좀 하고 성경공부 좀 하면 신학하라고 한다. 왜그런가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평신도가 목사처럼 구는 것이 거슬리는 것이다. 나는 못하는데 쟤는 왜 저렇게 설치나 하는 심리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목사 부류로 몰아내고 싶어한다. 비교당하기 싫어서. 억지해석인가?
아무튼 전문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면 다 lay person이 된다. 평신도 (laity)라는 말은 별로 쓸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우린 다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부름에 합당한 사명이 누구에게나 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일터가 바로 흩어져 있는 교회이다. 광야교회와도 같이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고 주님이 통치하는 곳이다. 우린 너무 주님과 먼 길을 가고 있다. 어쩌면 주일날 예배 마치고 나오면서 주님과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지도 모른다. "예수님, 다음 주에 뵈요." 우리는 스스로는 제한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할일도 모르는 채 어디론가 달려가는 바보 같이 말이다. 방향을 잘못가고 있는 사람이 가장 빨리가는 길은 멈추고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자존심 때문에 잘못되었는데도 계속가는 것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게 된다. 가장 좋은 차는 브레이크가 잘 드는 차다. 빠른차가 가장 좋은 차가 아니다.
이제 평신도라는 굴레를 벗자. 아니 내가 나 자신에게 씌어놓은 게으름이라는 안전띠를 벗어 던지고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가자. 이제 나의 사명을 찾아서 남의 여생을 던지도록 하자.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가장 안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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