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우목사 증조할머님 이야기
- 작성자 :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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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3-23 21:17
안녕하세요? 이재우목사입니다. 제가 설교때 가끔 증조할머니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이 돌아가신지 60주년이라고 저의 큰아버님께서 증조할머니에 대해서 보내주셨네요. 제가 잘못 소개한 부분도있고해서 함께 나누기 위해서 올립니다. 지나가시던 선교사님께 복음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제가 잘못 알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글은 우리 집안을 자랑함도 아니고 오직 한명의 헌신된 신앙인을 통하여서 한가족이 대대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는 이야기를 나누려함입니다. 읽으시고 도전받으시고, 우리도 우리가정에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고 자녀들이 후손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길수있도록 나 자신이 먼저 헌신하고 기도하는 신앙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하며 글을 올립니다.
할머니 서귀옥 윤자 성도의 60주년을 맞아 할머니를 추모하며 (2012년 음 3월2일) 양3월27일
할머니 서귀옥 (윤자) 성도는 1890년 3월 3일 영천에서 부친 徐炳용과 모친 朴雲川 사이에 태어나 울산 두동면 구미리의 이인영과 결혼하여 1912년 11월 22일 22살에 큰 아들 이규대를 출산하고 그 후 둘 째 아들 이규봉을 나았으나 남편이 갑작스런 병으로 1919년 1월 15일 세상을 떠나자 29세로 홀어머니가 되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두 아들을 길러야 했다. 나이42세 곧 큰 아들이 20세에1932년 10월 18일 경북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 298 김태진의 딸18세의 김인조와 결혼하게 되다.당시 집안 형편은 너무나 가난하였다. 땅도 없고 집은 지금의 텃밭에 조그만 방 두개의 오두막 집으로 지붕에 비가 새고 초석 자리는 떨어지고 문은 바람이 절로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 며느리를 맞은 것이다. 아들은 결혼하자 말자 집안 서호 사촌 형이 일본에서 부르기에 돈을 벌겠다고 일본으로 건너 갔으니 젊은 시어머니와 며누리가 집을 지키며 살다. 가장이 없는 집안의 당시 어려움은 가히 짐작 이 간다. 일본에 갔던 아들은 1년동안 고생만 하고 돈은 벌지 못하였기에 한국에서 그만큼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1년만에 돌아 오다. 그는 밭을 일구고 열심히 사는 길을 찾으며 농업 협동 조합의 돈을 빌려 묵은 땅을 사고 그리고는 부부가 함께 개간하여 농사를 하고 빌린 돈을 갚고 다시 융자를 얻어 땅을 사고 하여 농토를 확보하고 확장하여 안정을 찾아 구미리 177번지로 이사하다. 할머니에게 첫 손녀 종경이 1935년 5월 24일 새로이 이사한 집에서 태어나다. 언제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둘째 아들 이규봉이 병이 들어 고생하면서 구정의 작은 동서로 부터 예수 믿으면 아들의 병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정에 있던 모든 사귀 섬기던 것을 버리고 월평교회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아들의 병이 고침을 받다. 손녀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월평교회에 다니다. 내가 장손으로 태어난 때 (1941년 7월 7일) 어머니는 일에 분주하여 나를 안아 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가 나를 길렀다. 할머니의 성품은 깔끔하면서 동시에 여유가 없는 정도라 자식과 며느리와 좋은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나 또 참으로 귀한 면이 있다. 큰 며느리가 시집 온 때 그는 많은 형제들 틈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글을 깨우치지 못하였기에 할머니가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이로서 어머님이 찬송 성경을 마음껏 읽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내가 걸음을 걸을 때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산을 넘어 5리가 넘는 곳에 있는 월평교회로 갔다. 내가 어려서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주일학교에서 성경구절이 적힌 아름다운 카드를 가져다가 벽에 붙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할머니와 잠을 자고 할머니의 양육을 받고 자라 어머니는 나를 할머니에게 빼앗긴 감정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항상 흰옷에 깨끗한 차림으로 새벽마다 마당의 두지 옆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새벽에 월평 교회까지 갈 수가 없으니 집에서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 주를 믿지 않았기에 신앙문제로 가정에 불화가 자주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신앙문제 외에 다른 문제가 있었는 것으로 본다. 작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아들과 의논 없이 그를 도와주려 하고 이것이 지나치게 되자 불화로 발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버지의 효심은 겨울이나 비가 올 때 자기 어머니가 월평까지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당산 동리에 기도처 교회당을 짓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할머니의 소원이 아니었겠나. 집 밭에 조그만 초가집으로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시작한 것이 1948년 2월이다. 처음은 월평에서 영수, 조사가 와서 주일 예배를 인도 하였지만 결국 교회 분립을 싫어하여 인정하지 않기에 교회는 거리가 더 먼 은편 교회와 관련을 맺고 도움을 얻다. 이은수 장로나 박장국 집사 등이 와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다. 어머니는 교회에 출석하고 오는 손님을 접대하였으나 아버님은 아직 교회 출석을 하지 않으시다. 아버님이 할머니를 위하여 예배당을 지어 드린 것을 보면 그가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한 것 보다는 모자간의 성격과 생활 방식 갈등으로 인한 불화라고 생각이 된다. 나로서는 당시의 교회 생활이 잘 기억 나지 않으나 누님과 같이 찬송을 3x5 카드에 기록하여 열심히 찬송하던 것을 생각한다. 어느 날 내가 기록한 찬송집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내가 찬송을 잃어 찬송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찾아 달라고 기도한 후 내가 앉아 기도하던 책상 서랍을 열자 그것이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 내가 기도의 응답을 받은 처음 사실이다. 이것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11살, 누님이17살로 할머님이 살아계시던 때다. 우리 집에서 사랑채를 짓고 아버님은 사랑채에 거하시고 나는 할머니와 함께 큰 방 열 멀방에 책상을 두고 지난 것으로 안다. 할머님이 편찮으시다.연세도 많지 않은데 말이다. 나는 그간 집안 큰 댁에서 할아버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 죽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 되었다. 죽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끌려 가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달랐다. 평온하다. 그의 마지막 밤이다. 두 아들 두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가 둘러 앉아 있는데 큰 아들의 손을 잡고 말씀 하신다. 내가 하나님께 갈 때가 되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네가 에수를 믿지 않았지만 내가 죽거든 너도 예수 믿고 내가 가는 천국으로 오너라 거기서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 그날밤 편안하게 주님 품에 가셨다. 그것이 1952년 임진년 3월 2일 (양력 3월 27일) 하루 모자라는 만 62세시다. 예배당이 설립된지 어언 4년의 세월이 지나고 교회에서 예배하며 장례식을 가지다. 장례가 끝난 후 아버님이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한다. 어머님이 살아 계신동안 내가 불효하여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어머님이 예수 믿으라고 유언을 남겼으니 내가 유언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 예수를 믿도록 하겠다. 그러나 3년상 치는 동안 3년만 믿겠다고 하셨다. 그는 담뱃대를 버리고 예배당에 나가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기 전 주께서 그를 만나 주시어 평생토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시게 되었다. 할머니는 가셨으나 그의 후손은 믿음으로 뻗어가고 있음이 감사하다.
할머니를 추모하며 그분은 우리 가정에 기독교 복음을 가져오신 분이시다. 그가 우리 동리의 일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문의 전통과 갈등을 넘어 가정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 일을 이루었다. 유언을 남겨서까지 큰 아들로 주를 믿게 하시다.
나에게 귀한 신앙의 모범을 남겼다. 그는 기도하며 말씀 읽으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셨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의 신앙 생활의 바탕이 되고 내가 중학교에 가며 집을 떠나 있을 때에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바른 길을 갈 수 있었음이 감사한 일이다. 그러면서 신앙과 삶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신학교에 가고 주의 종이 된 것이나 할머니 후손에서 주의 종이 많이 배출된 것도 할머니 기도에 힘 입은 것이라 본다. 우리 집 은경 보경이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 교수가 된 것, 큰 딸 신우가 대학을 휴학하고 성경대학을 먼저 끝내고 남편 될 사람을 전도하여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결혼하여 지금 교회에서 남편은 찬양 인도자로 활약하고 신우는 아동부 교육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누님 가정에 김건 목사가 나오고 또 희라의 남편 김영근목사가 목회하며 교수하고 있다. 동생이 아버님이 세운 교회당 옆에 새로운 예배당을 신축하고 장로로 섬기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목회하고 있고 두 아들 임우 재우가 모두 신학을 졸업하고 사역하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또 사촌 종휘가 목사로서 목회하고 종헌의 아들 충우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서 지금 사역하는 것이 또한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라 감사한 일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가정 전체를 복음화하고 대를 이어 믿음의 유산을 가지게 된 것이 감사한 것 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대를 이어 가듯 우리 가정은 할머니의 대를 이어 자자 손손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계속 복음을 확장하며 증거하는 복된 믿음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할머니의 묘소는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중리 소재 가족 선영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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