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크라멘토는 나의 가나안 땅"

조회 수 38492 추천 수 0 2017.06.30 19:43:06

"새크라멘토는 나의 가나안 "

 

이영무

 

 

이 글의 제목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박상근 목사님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의 창작이다 (521, 2017년 설교 내용 중). 나도 비슷한 생각은 하였으나 그렇게 똑 부러지게 "가나안" 땅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었다. 사실 새크라멘토(새토)는 풍요의 상직적인 땅이다. 다시 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다. 문제는 새토에 사는 많은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점에 대하여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새토를 지나가는 두개의 강물을 보자. 하나는 저 멀리 서쪽 시에라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꽉 찬 America River, 또 하나는 북쪽 Shasta 산에서 흘러오는 Sacramento River 이다. 이 두 강이 흐르면서 만나는 곳이 바로 새토이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사실상 새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상이다. 우선 아메리카강 양쪽으로 펼쳐진 강공원은 자전거 하이킹 등으로 미국 내에서 잘 알려진 곳이며 Delta(the Sacramento-San Joaquin River) 쪽으로 향하면 수많은 과수원이 있고 서남쪽을 쳐다보면 신비스러운 Diablo 산과 운하가 보이며 시내 중심부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정부 청사(the State Capital)와 새로운 명물인 Golden 1 Center가 있고 지척인 Folsom Lake, 조금 멀리 보면 세계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요세미티 공원이 불과 3시간 거리에 있으며 신비로 가득 찬 샤스타 산, Lake Tahoe며 나파의 포도주,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새토는 벼농사를 비롯한 큰 농업의 땅이다. 이 근처에서 나오는 단맛이 도는 과실이 얼마나 많은가? 복숭아, 자두, 앵두, 사과, 포도 등등 수를 샐 수가 없을 정도다. 토마토는 미국 전체의 80%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45분 떨어진 곳에는 Apple Hill이 자리 잡고 있다. 근처에는 농장도 많아 젖(밀크)도 풍부히 나오며 벌들을 유혹하는 나무, 꽃 종류도 많아 근처에서 나오는 꿀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꼭 근처에서 생산되는 젖과 꿀을 마신다. 따라서 새토는 상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내가 새토에 육체적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이지만 미국의 비유적 가나안땅에 안착 할 때까지는 정신적인 시내(Sinai) 광야를 40(정확히 37) 가까이 헤매어야 했다. 이제부터 그 정신적 시내광야에서의 생활과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키며 가나안 땅의 주민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한다. 진정한 주민은 육체적 안주뿐만 아니라 영적인 뒷받침이 꼭 필요함을 터득 하였다. 그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약간의 새토 소개도 아울러 하면서.

내가 처음 새토 근처인 데비스(Davis)로 온 것은1970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UC Berkeley 대학원 학생이었는데 지도교수님(W. Duane Brown)UC Davis로 옮기시게 되어 그분을 따라 옮기게 되었다. 한창 진행 중이었던 연구도 마쳐야하고 논문도 써야 되기 때문에 캠퍼스간 교환학생으로(Inter campus exchange student) Berkeley에서 Davis 온 것이다. 그 더운 농촌 캠퍼스로 옮기는 나를 많은 동료학생들은 이해를 못하였다. 완전히 옮기기 6개월 전에 데비스에 와서 하루 종일 캠퍼스를 비롯하여 주위 동네들을 살폈다. 나에게는 딱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전원적이고 사람과 차들이 많지 않고 하여 항상 북적거리는 버클리와는 상반되는 곳이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나에게는 그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연구를 하는데 산만하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 좋을 것 같았다. 옮긴 후에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버클리로 내려가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버클리에 소속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버클리로 내려 갈 때는 전쟁터에 나가는 듯 마지못해 갔지만 데비스로 돌아 올 때는 집을 찾아오는 느낌이곤 하였다. 내가 데비스에서 새토로 아파트를 옮긴 것은 19716월이다. 같은 해 3월에 결혼을 하였고 아내의 새로운 직장이 UC Davis Medical Center이었기 때문이다. 바쁘고 자주 밤에도 불려 나가는 아내를 고려하여 병원근처에 신혼의 둥지를 마련 한 것이다. 나는 새벽에 데비스로 등교( 35분 거리)하였고 저녁 해가 진 다음에야 집에 들어오곤 하였으며 집사람은 집보다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바쁜 중에도 우리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신혼을 즐겼다. 나는 주로 데비스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새토 지리에는 거의 장님이었다. 예로 집에서 불과 5 마일 떨어진 아메리카강을 발견(?) 하는데 2년이 넘어 걸렸다. 아파트는 새토에 연구실은 데비스에 소속은 버클리 학생으로 그곳에 자주 내려가야 하니 문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렇게 바쁜 생활은 1973년 대학원을 수료 할 때까지 계속되어 사실상 새토에 살면서도 이곳의 지리나 사람, 풍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1973년 여름부터는 전문분야 연구훈련 (Postdoctoral Fellowship Training)을 데비스 의과대학 생화학과에서 시작함에 따라 정신적 여유가 생겨 이곳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가본 곳은 America River이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강물이 도시중심을 지나며 흐른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또 이강을 따라가며 이어지는 자전거길이나 하이킹 코스는 일품이었다. 또 이 강변 주위를 따라있는 America River Park은 사실상 자연 그대로 유지되어서 야생동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사슴을 비롯하여 스컹크, 가요디(Coyote), 독사뱀, 토끼, 여우, 칠면조 등등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또 강에는 6월 전후하여 산란을 위한 준치 떼가 올라오며 가을에는 연어가 역류를 타고 전신이 벗겨지면서도 열심이 올라온다. 물론 낚시꾼들의 기쁨은 말 할 것도 없고. 강에서 동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시에라 높은 산 정상에 쌓여있는 눈이 시선을 끈다. 초록색 초원에 푸른 강에서 보는 멀고 높은 산의 눈이 주는 운치는 대단하다. 이곳이 천국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반면 많은 사람들이 새토는 여름에 너무나 덥다고 심한 불평들을 많이 한다. 사실 무지하게 덥다. 때로는 110F 이상으로 올라가며 100F가 넘는 날들이 30일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러나 일단 해가지면 건조한 열(Dry heat)이 일품이다. 나는 이 건조한 열을 몹시 즐긴다. 하이킹, 달리기, 자전거 등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건물 안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지만 저녁식사 이후는 여름저녁 시간을 마음껏 즐긴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무더운 날씨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햇볕을 막으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뿐이었다. 그래서 새토는 녹지대로 나무가 제일 많은 도시 중 하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새토는 나무로 울창한 지역임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래서 시 전체를 덮고 있는 나무덮개 (Tree Canopy)가 미국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새토하면 1849년대의 Gold Rush를 빼놓을 수 없다. John Sutter Sr.의 고용인이었던 James Marshall1948Sutter's Mill에서 금을 처음 발견하면서부터 California Gold Rush는 시작된다. 금발견의 소문은 빨리도 퍼져나가 Sacramento Valley에는 80,000명의 사람들로 홍수를(49ers) 일으켰다. 아이러니는 Marshall이나 Sutter나 혹은 대부분의 49ers 들은 금의 혜택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큰 수혜자들은 그들을 도와주던 장사꾼들(음식과 기타 생활용품을 제공한자들)이었다고 한다. 새토에서 30여 마일 떨어진 Coloma는 당시 골드 붐을 일으킨 동네로 지금은 제임스 마샬 공원으로 바뀌었고 수많은 하이킹 코스가 아메리카 강 상류인 South Fork River를 중심으로 펼쳐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새토는 Sutter family(John Sutter Sr. and Jr.)와 사업가인 Samuel Brannon에 의하여 1848년 아메리카와 새크라멘토 두 강이 만나는 곳(대체로 지금의 Old Sacramento)에서 시작되었다. 1879년 주청사 소재지로 지정되었고 현재의 인구는 약 500,000(주변인구를 합하면 2.5 Million)으로 캘리포니아에서 6번째 큰 도시이며 미국전체에서는 35번째이다. 2002년 하버드대학 Civil Right (Time Magazine의 의뢰로) 연구에 의하면 새토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이 다양한 도사로 지명되었다. 역사적인 Old Sacramento는 가장 앞서 패션 유행을 따라가는 동네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새토에 대한 나의 애착은 1975년 여름 아들 Robert가 태어나면서부터 더욱 커갔다. 나는 집사람과 아들의 장래를 고려하여 가급적 데비스-새토 근처에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하였다. 헌데 1978년 큰 시련이 닥쳐왔다. 나의 건강문제이었다. 나의 왼쪽 팔에 악성종양(Desmoid sarcoma tumor)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악성종양은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하면서 종양을 제거하였다. 그냥 놔두면 팔을 잘라내야 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하여 계속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세 번의 수술이 끝난 이후에도 종양은 계속 자라나는 것이었다. 의사들과 심각한 의논 끝에 방사능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높은 에너지 X-Ray로 종양을 2개월간 쏘였다. 심한 피로감은 치료 중에 또 치료 후에 몇 개월간 지속되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십이지장 궤양이 다시 악화 되어가고 있었다(사실 이 궤양은 나를 은퇴 전까지 계속 괴롭혔다). 총 일 년이 넘는 투병은 내 경력발전 (Career development)에 큰 차질을 가지고 왔다. 우선 일 년여 연구생활에 총력을 기우릴 수 없어 중요한 시점에서 경쟁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특수 분야 연구원 생활(postdoctoral training)을 이미 5년 하였으나 학교로부터 영구적인 position을 확보할 수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초조감이 나를 엄습했고 몹시 괴롭혔으며 끝내는 극도의 좌절감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조그만 일에도 화를 벌컥 내었으며 화목하고 원만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었다. 더하여 술을 마시는 빈도가 늘어났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시작하였다. 내 삶은 이제 정지 하였나 싶고 무척 고독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과 연구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최후의 보루인 인내심과 반발력 (resilience)으로 일어나 절실한 삶을 다시 계속 하였다. 모든 자존심을 떨어내고 5년이 넘어서는 훈련 연구원생활을 계속하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급적 피하였다. 나의 직위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참을 수 없게 괴로웠다. 나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연구생활과 무기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데 나의 운명을 걸고 새로운 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우리분야에서 HPLC (High Performance Liquid Chromatography)라는 새로운 개념의 "분리" 기술법 (separation technology)이 등장하여 물질들을 분리하는데 혁명을 가져왔다. 새로운 기술이 다 그러 하였듯이 HPLC의 실제응용이 쉽지 않아 특수훈련과 지속적인 연습이 필수였다. 나의 연구는 항상 초미량의 단백질을 축출하고 분석하는 것이 시작이기 때문에 예민하고 빠른 속도의 새 기술은 내가 꼭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연구에도 진전이 있었고 좋은 내용의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HPLC의 권위자가 되었고 많은 연구원들을 훈련시키곤 하였다. 종양수술 후 3년만의 일이었다. 일련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연구교수로 승진되었다. 8년 동안의 길고 긴 터널이 이제는 끝나는 것인가? 내 연구 분야의 스승(mentor)이던 Jack Preiss 교수께서 미시간주립대학 생화학과 과주임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나도 같이 가자고 초청을 하였다. 미시간대학에 새로운 단백질분석 연구실을 만드는데 나를 그 책임자로 임명하고 이분이 과주임으로 행정적 업무를 하는 동안 내가 그분의 연구실을 사실상 운영하며 점차로 완전히 독립된 교수로 되는 것이 조건이었다. 내 경력의 발전을 위하여는 너무나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내의 안정된 직업을 뿌리 채로 흔들고 어린 아들이 예민한 나이에 낯선 학교로 전학하는 것은 많은 모험이 있기 때문에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특히 아내는 추운 곳을 무척 싫어하는 터라 나의 고민은 더욱 컸다. 3개월간의 집사람과의 의논 끝에 미시간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내 이력을 고려하는 아내의 조언이 결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단 나 혼자서 먼저 가서 그곳의 상황을 살피고 아내와 아들은 일 년 후 쯤 오는 것으로 잠정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19855월초 아침에 미시간으로 차를 몰기 시작하였다. 나를 배웅하며 조용하게 슬퍼하는 아내를 뒤로하며 떠나는 것은 강심장의 사람만 할 수 있는 크나큰 어려움이었다. 이날을 아직 잊지 못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떠난 날부터 아내는 후두염(laryngitis)으로 목의 소리상자 (larynx)가 막혀 일주일 이상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어 10살의 아들을 통하여 안부소식을 전하고 듣고 하였다. 내가 혼자 떠나는 것이 아내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던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었다.

5일후 미시간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과주임과 함께 연구실을 꾸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분자 분석실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력을 다 하는 첫 번째 큰 임무는 두개의 연구실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다행히 처음에는 가르치는(Teaching assignment) 부담은 가벼웠다.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미시간에 온 나로서는 오로지 목적 달성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을 하여 6개월 내에 두개의 연구실을 거의 완전하게 완성시켜 주위에서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이스트 랜싱의 학교 타운에서는 일 하는 것 이외에는 별로 할 것도 없고 하여 연구만 열심히 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고분자 구조 연구실을 완성시켜 미시간주립대학 캠퍼스의 명물로 군림 하였다. 하지만 연구실 밖에서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바퀴벌레로 오염되었으며 녹물이 나오는 교내의 교수 아파트 생활은 괴로웠다. 또 변변한 식당이라고는 주위에 없어 먹는 것도 시원치 못 하였다. 괜찮은 중국 음식점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몸은 여위어가고 건강은 하향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미국에서 최초의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물론 한인사회에서도 기러기 엄마나 아빠라는 용어는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같은 해 가을 아내와 아들이 미시간을 방문하였다. 아내는 직장 면접을 하기위하여 또 나와 함께 주택을 구입하기 위하여 며칠을 바쁘게 보냈다. 헌데 집사람이 일할 병원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우선 거리가 학교에서 25 마일 멀리 있고 병원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찮다고 집사람은 하였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의 걱정은 출퇴근이었다. 눈보라에 빙판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의논 끝에 그 병원은 그만두기로 하고 집을 사는 것도 미루었다. 가족들의 미시건 이주가 또 연기된 것이었다. 혼자 좀 더 견디면서 두고 보자. 모든 일을 신중하게 생각 또 생각 하여보자. 나에게는 정말로 좋은 직장이며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무척 좋아했으며 주위의 동료 교수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도 친절하고 사귈 만 하였다. 하지만 집사람도 나 못지않게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직장을 갖기를 나는 무척 원하였다. 그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자.

1986년도는 그 시작부터 무척 바빴다. 연구실의 완성과 함께 대학원 학생들을 유치하여야 하고 새로운 훈련 연구원들도 돌보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컨설팅도 하여야하고 단백질 미량분석 등 보통 연구실에서는 어려운 일 등을 직접해야 했다. 보조하는 조교들을 구했지만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아파트로 밤늦게 돌아오면 가족들 걱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를 이주시킬 것인가 아니면 계속 이대로 살 것인가? 미시건에서의 처음 겨울은 추웠고 눈도 많이 내렸다. 쌓인 눈을 아침마다 쓸어내야 하고 차 유리창의 얼음을 긁어내야하고. 이런 겨울날 운전은 캘리포니아에서의 운전과는 달랐다. 눈도 눈이지만 빙판의 길에서 미끄러지는 차를 운전하려면 고도의 주의가 필요하였다. 나는 추위를 좋아하고 눈 내리는 것을 즐겼지만 아내는 정반대였다. 추위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미시건 겨울을 지날 수 있을까? 또 빙판에서의 운전은 어떻게 하고? 미시건 첫 겨울을 지내고나서 내 생각이 바뀌기 시작 하였다. 아무래도 춥고 눈 내리는 빙판의 이곳으로 아내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미시간으로 오겠다고 우기는 집사람을 매일 전화로 달래는 것이 나의 저녁시간의 일과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새토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안부가 항상 나를 괴롭혔다. 아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 내가 걱정할까봐 이야기 못하는 것들은 없나? 매일 내일의 안위와 다른 모든 일들이 제대로 풀리고 있는지? 괴롭히는 주위사람들은 없나? 등등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래서 나는 새토 집으로 4-6 주의 간격을 두고 찾아왔다. 그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토 집을 미시간에서 찾아올 때마다 느꼈던 것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새토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펼쳐진 논밭에 흐르는 강물에 초록색이 도는 정경은 척박한 미시건과는 대조가 되었다. 또 야경은? 시에라 산맥을 넘어 새토 근처로 다가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새토의 불빛은 수없이 많았고 밝았다. 이것 역시 미시건과는 달랐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그곳의 야경은 오직 암흑이었다. 드문 드문 보는 불빛이 전부였고 새토의 아름다운 정경과는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번창 번성하는 새토와 자동차 산업이 서리를 맞은 미시건과는 너무나 극명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또 가까운 사람들도 그립곤 하였다. 미시건에서의 한국인 친구라고는 단 한명. 그것도 90분 떨어진 아나보에 있는 대학동창 뿐이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미시건은 나의 마음속에서 떠나고 있었다. 1986년 여름부터 캘리포니아로 다시 옮길 것을 마음먹고 있었다. 내가 떠나도 미시간주립대학에는 큰 불편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완성된 연구실이니 연구 능력 자격을 갖춘 과학자이면 그 운영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나의 결심을 전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돌아온다는 기쁨 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가 그를 위하여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한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처럼 안정되고 보장된 위치를 뒤로 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내를 끝내 설득하였다: 못지않게 좋은 Job을 이곳에서도 만들어 갈 수가 있다는 나의 자신감을 피력 하였으며 나 혼자 좋다고 당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내가 강조하였던 것은 Win- Win situation이었다.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나를 미시간으로 불러준 과주임에게 나의 결심을 들려주었다. 과주임은 다행히 이해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마음고생과 고민하는 것이 그의 눈에도 이미 비추었을 것이다. 과에서는 내가 이혼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다른 동료교수들은 나의 결심에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한 교수는 나에게 천국은 이 세상에 없다하며 머무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직장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의 캘리포니아 경제사정이 극도로 나빠 과가 통폐합하는 가주 대학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껴져 당시 한창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는 생명공학 회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1986년 가을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응용면역에 중점을 둔 막 시작한 회사로 결정하였다. 마음에 썩 내키는 회사는 아니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많지는 않았다. 19872월 미시간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그래서 기러기아빠 생활은 끝을 맺었다..

실리콘 벨리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내는 새토에 계속 머물고, 나는 주말이면 집으로 오는 생활이었다. 좀 불편하지만 견딜 수 있는 출퇴근(Commute schedule)이었다. 소위 말하는 주말부부가 되었다. 기러기아빠 생활보다는 나았으나 이번에는 3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아들 성범이가 동부의 한 학교로 옮기었기 때문이다. 우리가족의 분산생활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분산생활이 역설적이었지만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미처 몰랐던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언급하면 1980년대에 주말부부란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나는 첫 번째 기러기아빠이자 주말부부란 자랑스러운(?)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처음 2개월간은 회사의 성격과 연구내용들을 자세히 살피는 기간이었다. 전체적으로 보건데 나의 전문분야인 단백질생화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하여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회사를 위하여 크게 공헌 하기는 어려웠다. 이 회사의 생명공학으로써의 개념은 훌륭하였으나 연구에서부터 시작하여 개발(Development)하여 상품(product)으로 연결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나의 전문분야는 아니었지만 나의 계산으로는 마지막 상품이 나올 때까지는 수십 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장시간 연구비를 대어줄 스폰서는 없었다. 5년 후부터 심각한 경제적 압박이 시작되었고 많은 연구실과 오피스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였다. 회사원 모두가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연구를 계속할 자금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여지껏 노력한 연구들이 아깝지만 나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였다. 하지만 생존확률이 극도로 나쁜 다른 생명공학 회사에 다시 모험을 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재활작업이 필요하였다. 7년여 회사에서 물려받은 정신적 물리적 먼지와 타성을 먼저 털어 내어야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스탠포드 대학에 새로 건립된 Beckman Center의 한 연구실에 방문과학자의 자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Mass Spectrometry (MS)를 이용한 단백질분석을 새로이 배우게 되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MS를 터득 하는 것은 나의 꿈이었다. 그 기회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찾아온 것이다. MS1980년도부터 새로이 떠오르는 분야로 미래의 단백질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도구였다. 재래식 단백질연구에 MS를 더 하였으니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대로 이루어져 무척 기뻤다. 스탠포드 대학에서의 일년 가까운 연구생활을 통하여 또 다른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습득할 수있게 되어 많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인근대학에 open position 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마침 데비스 가주대학 단백질 구조연구실소장자리가 공석이라는 소식을 듣고 곧 응모하였다. 이것은 내가 꿈에서 바라던 직장이다. 아내와 다시 합칠 수 있는 최대의 기회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스탠포드 Beckman Center에서도 비슷한 직장을 제의하여왔다. 이 제의도 거절할 수 없는 좋은 것이었지만 나의 최우선은 새토 근처로 와서 8년여 주말부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까다롭고 복잡한 데비스 대학의 interview를 마치고 자격이 인정되어 이곳으로 드디어 오게 되었다. 나의 단백질 화학의 스승 (mentor)이셨던 William Benisek 교수의 적극적인 추천과 그의 나에 대한 믿음이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말하여 둔다. 데비스로 오게 된 것은 사실상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사람들은 항상 절실한 삶의 태도로 일을 꾸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것이다. 회사를 나온 후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새로운 과학기술에 전념을 다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연구를 또한 도와주었다. 좌절감을 크게 느끼지 않고 최대의 노력을 연구와 과학기술 습득에 쏟아 넣었기에 소원대로 대학에 그것도 데비스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절실한 삶을 하는 저에게 등불을 항상 켜주신 그분이 계셨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 바이다.

19951월부터 데비스에서의 학교생활은 시작되었다. 어느 때 보다도 나의 결심이 새로웠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10년전 떠났던 캠퍼스는 많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정난에 시달렸음이 눈에 들어왔다. 한 예로 건물의 청소는 매일 매일이 아니라 3일에 한 번씩이었다. 인건비를 줄이느라 청소부는 3명중 2 명이 해고 된 것이었다. 내 사무실은 물론 연구실 전체가 먼지로 싸여있는 상태 이었다. Staff member 들의 얼굴에서 활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또 제일 큰 걱정은 노후된 장비들 때문이었다. 점점 미량분석을 요하는 시점에서 오래된 예민도가 떨어지는 기기를 가지고 소량의 단백질 분석은 무척 어려웠다. 과학의 빠른 발전 속도로 1990년도부터는 1980년에 비하여 10배 이상의 미량분석이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주어진 조건 아래서는 연구에 많은 제한이 따라왔다. 좀 더 발전된 새로운 장비를 구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장비들은 무척 비싸 기계 한 대당 $150,000이 넘었다. 학교에서 자금을 지급받는 것은 불가능 하였으며 오로지 연방정부 기관 (NIH)Grant 신청을 하여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2년이 넘는 과정이고 또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10%도 안 되었다. 무척 고민 하던 중 좋은 소식이 왔다. 다니던 생명공학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4년전 구입한(당시에는 가장 Updated ) 2개의 장비 (protein sequencer HPLC)를 나에게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을 최후로 정리하는 회사로 써는 필요없는 기계들이었다. 좌우지간 무척 기뻤다. 이 기증받은 장비들은 최신은 아니지만 데비스의 기계 보다는 5년 이상 앞서 있었다. 예민도 (sensitivity)가 높은 기계 덕분에 좀 더 활발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캠퍼스의 나의 연구실에 대한 흥미는 차차 높아가고 많은 분석 의뢰와 콘설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외부 (off campus)에서도 점차로 많은 의뢰가 몰리기 시작하였다. 일을 신속히 할 수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컴퓨터의 케이블이 내가 속해있는 건물에 아직 연결되지 못한 것이었다. 전화로 연결된 모뎀은 너무나 느려 실제로 거의 무용지물 이었다. 신속한 인터넷 연결은 필수였다. 수개월을 대학당국에 촉구하고 협상하여 드디어 케이블 서비스가 내 연구실에 들어왔다. 이때는 1996년 말로 기억된다. 연구실의 기본 구조가 이루어진 후 나의 초점은 예민도가 가장 높은 최신의 protein sequencerproteomics라는 새로운 단백질 연구를 위해서는 필수인 mass spectrometer의 구입에 전력을 다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MS lab 의 디렉터 (director)를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MS lab의 기기들은 너무나 오래되고 소 분자나 무기물질의 분석에는 도움이 되나 내가 하고자하는 단백질 연구에는 전혀 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할일은 낙후된 기기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다음은 NIH Grant 신청을 하는 것이었다. 또 재래식 분석과 MS분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lab을 만드는 것이었다. 학교당국의 허락과 재정지원을 받아 캠퍼스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 내에 새로운 고분자분석 연구실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캠퍼스 내에 많은 교수들이 새로운 MS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group effort (Bruce Hammock 교수의 leadership)NIH에 그랜트 신청을 하게 된다. 또 캠퍼스내의 연구를 총괄하던 Kevin Smith 교수는 matching fund를 약속하였다. 그랜트는 통과 되었고 따라서 matching fund도 허락되어 갑자기 두 대의 MS를 구입하는 행운이 따라왔다. 더하여 내가 신청 하였던 protein sequencer NIH grant도 통과되어 가장 예민한 기기를 구입하였다. 명실공히 Proteomics Lab 2000년 초부터 데비스 캠퍼스에 탄생한 것이다. 다른 많은 대학에 비하여 상당히 앞선 성과이었다. 동료 교수들의 변함없는 도움과 헌신 없이는 이렇게 좋은 결실을 가져올 수 없었음을 강조한다. 이 새로운 연구실을 통하여 나는 많은 캠퍼스 내외의 과학자들을 도와주었고 또 나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내 연구는 단백질 분석 중 가장 어려운 분야 (phosphorylation site characterization)에 도전 하였으며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나의 기쁨은 절정을 이루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경험과 새로이 습득한 지식 기술을 총동원시켜 마음껏 연구를 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연구문제를 해결하여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랜스 리버모어 (Lawrence Livermore) 등 다른 연구소와도 공동연구를 하였다. 같은 시기에 나는 group teaching에도 참여하였고 초청강사로 또 workshop 지도강사로 내 분야를 열심이 가르치기도 하였다. 따라서 연구뿐만 아니라 강의에도 바빴던 것이었다. NIH Study Session(신청된 그랜트를 심사하는 위원회)5년 동안 봉사하는 영광도 누렸다. 한창 활약 하던 때에 나의 나이는 60이 넘었고 내 희망은 65세에 은퇴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은퇴해 앞으로 태어날 손주들을 봐줄 것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향기가 아닌 절정기에 은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만 65세가 되는 20061월에 은퇴하였다. 데비스 캠퍼스에서 만 10년을 보낸 것이다. 내 경력 경로의 마지막 국면에 나의 온힘을 다하여 일하였기에 지금까지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한 가지 참고로 말하고 싶은 것은 데비스 생활을 하는 동안 실리콘 밸리를 전혀 미스 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중국음식을 포함한 ethnic foods가 아닌가 싶다. 하나 소시민인 우리에게는 전체적 생활의 질(quality of life)이 이쪽이 훨씬 좋았다. 또 그쪽에서 내가 접촉 하였던 많은 사람(여기서 한인들은 포함 되지 않는다. 유학생들 몇 명을 제하고는 접촉한 한인은 한명도 없었다)들은 내면의 실력(substance) 보다는 그 모양새(style)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생기곤 하였다. 소위 말하는 the SF Bay Area의 교통이 얼마나 고약한 지는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나는 사실상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버클리를 포함한 East Bay, SF, 미시간, 실리콘 밸리, 남쪽 캘리포니아, 보스톤, 뉴욕을 포함한 동부의 도시들, 시카고, 텍사스 등등. 그래서 상대적으로 어느 곳이 더 좋은지 공평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선택은 단연 새토이다. 삶의 질은 말할 것도 없고 자녀들 교육시키기도 무난하며 큰 교통체증도 없고, 모든 것이 풍부하며, 세계적인 공원들이 지척에 있으며 recreation을 위한 장소가 얼마나 많은가? 미국에서 인종분포가 제일 다양한 도시이니 살기에 편안한 곳이다. 문화적 삶(박물관 음악공연 예술의 질 등등)이 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아니다. 큰 도시로 가끔 나가서 그것들을 즐기는 편이 훨씬 좋다(적어도 나에게는). 큰 도시에 살면서 그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하고 바쁜 생활에 쫓겨서 그런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산다. 일부 부유한 사람들은 문화적 삶을 즐길 여유가 있으나 중산층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큰 도시에서 잘못 생활하면 내면의 실력은 쌓지 않고 모양새나 챙기는 사람들로 전락하기 쉽다. 이 점을 특히 유의하기 바란다. 산만한 삶을 피할 수 있는 이곳 새토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 인지를 재차 강조하고 싶다.

데비스에서의 10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거의 40년간의 미국에서의 과학자 생활에 그 마침표를 달았다. 힘들고 기복 많은 과학자 생활이었지만 마지막 10년을 힘차게 달리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항상 같이하시며 힘을 주신 그 무한한 존재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연구실의 문을 나섰다. 또 넘어진 나에게 손을 내미시고 마음속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여주신 또 큰 과오 없이 무사히 모든 것을 마칠 수 있게 하여주신 주님께 고개를 숙였다. 나와 생사고락을 특히 어려운 시간을 불평없이 뒤에서 밀어준 아내에게 무척 고맙다. 은퇴 후 몇 개월을 그동안 미루었던 집안일을 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나 자신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기쁘고 감사하게 여겨지는 마음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면서 무엇인가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나에게는 인생의 제일 중요한 목적이 결여되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손을 대지 못하였던 철학과 종교 계통의 책들을 읽어보기 시작했으며 어떤 책들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합심된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독서와 묵상을 통하여 그 무한한 존재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중요하였던 것은 나의 과거를 회상하여 보면서 그 무한한 존재가 나의 과거의 몇 몇 순간에 개입 하셨던 사실이었다(“천국이란 수수꺼기”). 그래서 오늘의 내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분의 존재를 좀 더 공부하며 인생의 나침판을 구하는 것이 나의 다음 과정이라고 생각되어 한 교회에 나가게 된다. 그 교회가 지금 나가고 있는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이다. 이 시점의 나를 구태여 출애굽기의 연대기와 비교 한다면 나는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 도착 하였다고 믿고 싶다. 40년 가까운 정신적 시내광야를 헤매면서 은퇴와 더불어 가나안땅의 지척에 이른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건 데 비유적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는 넘어야 할 정신적인 여리고 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학자의 생활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지나친 자신감과 자존심에 빠지기 쉬우며 냉철-헌신- 노력으로 과학을 변화 진전시킬 수는 있어도 자신을 변화 시킨다는 개념이 과학사전에는 없었다. 내가 당면하였던 것은 나 자신을 변화 시키는 과제였다. 여리고성을 함락 시키듯 나는 나를 정복하여야지만 가나안땅에 비로써 안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로써 세상이 나를 위하여 변하기만 원 하였다. 하지만 가족생활부터 시작하여 대인관계, 교회생활, 참된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에 적응하기 위하여 내가 변하여야 하는 것은 필수인 것이다. 그 필요성을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 고집불통의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교회생활의 덕분이었다. 자기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되는 성경에 근거를 둔, 마음에서 우러나서 전하는 그래서 설득력있는 설교와 그 성경적 예들은 나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내가 조금씩 변하는 것에 제일 놀란 사람은 내 자신이었다. 상세한 것을 피하고 결론을 얘기하면 나 자신의 변화는(물론 완전한 변화에는 거리가 멀지만) 나 자신을 우선 여러모로 살렸다. 모든 것이 쉬워지기 시작하였으며 화를 낼 필요도 없었으며 선생님 특유의 꾸지람도 사라졌다. 왜 이렇게 평화스러운 마음상태를 진작 소유치 못했나? 이제야 마음 한구석에 사랑과 긍휼이 조금이나마 싹트기 시작한 때문일까?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느낄 수 있는 마음(Heart)과 공감(empathy) 그리고 그들을 향한 연민(compassion)이 생기는 것을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조금씩 변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극복하기 가장 어려웠던 그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무척 기쁘다. 모든 것이 풍요한 가나안땅인 새크라멘토에 안주할 수 있는 자격이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이 비유적 가나안땅에서 갈 길은 아직 멀다. 우선 믿음의 전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영적인 전투를 수행키 위해서는 그 각 지역을 순회하며 나를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이다. 먼저 쿰란을 들려 구약성경을 더 공부해야하며 갈릴리-겟세마네의 사역을 좀 더 가까이서 피부로 느껴야하며 성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이해한 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고 깊게 느껴보아야 할 것 같다. 모든 희망과 소망이 나에게 올지는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나는 아마도 그 분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그 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후보생 훈련을 계속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육체적 영적으로 나의 가나안땅 새크라멘토에 안주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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